오정윤 동구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제물포에 대한 기억을 남긴 외국인들의 대표적인 기록은 이렇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의 <한국으로의 항해>(1888), 프랑스 외교관인 끌라르 보티에(Claire Vautier)와 이뽈리뜨 브랑탱(Hippolyte Frandin)의 <한국에서>(1905), 고종(高宗)의 사진을 처음으로 촬영하여 한국에 사진술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퍼시벌 로런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6),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Landor)의 <코리아 또는 조선> 등이 있다.
이들이 남긴 제물포에 대한 첫 인상은 증기선을 타고 항구로 들어오면서 마주한 자연경관이었다. 이들은 작은 항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섬들과 아기자기한 해안선,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작은 바닷가 마을의 경관 등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감탄한다.
그러나 여행자들이 이런 자연 풍광을 뒤로 하고 첫 발을 디딘 제물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민둥산, 갯벌 때문에 삼판선으로 옮겨 타야만 상륙할 수 있는 정비되지 않은 항구라 할 수 없는 항구, 1m 정도 높이의 짚으로 엮은 지붕으로 된 누옥(陋屋)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선인 마을이 그들의 눈에는 생경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럽식의 하얀색 건축물들이 정비된 외국인 주거지와 정갈하게 정돈된 일본인 거주지, 나름대로 정비는 되어 있으나 청결하지 못한 중국인 거주지의 모습들을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방파제를 쌓느라 바지를 걷어붙인 채 흙을 나르는 수많은 조선인 토목 인부들, 헐렁한 반바지 같은 옷과 하얀 무명 조끼를 걸친 짐꾼들이 투박한 나무지게로 짐을 나르는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 무렵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 보이는 제물포에 대한 경험은 그들이 거쳐 간 항구와 인근의 거주지,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경인가도의 정비되지 않은 풍경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에 의해 발간된
여하튼 당시 서양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의 풍경은 그들이 거쳐 왔던, 조금 더 일찍 개항된 동아시아의 도시와는 달랐다. 아직은 항만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도시 기반 시설이 정비되지 않은 채 이제 막 일어서려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던 제물포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인천은 '인천 최초'가 '한국 최초'가 되는 경험을 정말 많이 할 정도로 서양 문물 도입의 물결을 최전선에서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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