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 유묵.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톡 교포신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만주 철도 도착역인 하얼빈과 채가구 중 어디서 내릴지는 모르는 상황. 안중근은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보내고 자신은 하얼빈에 남았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를 향해 4발을 쐈다. 그리고 뒤쪽 일본인 중 가장 의젓해 보이는 자에게 3발을 더 쐈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다.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일본 육군헌병 간수 치바는 안중근을 정성으로 보살폈고, 안 의사는 사형대로 가기 직전 답례로 유묵을 선물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 의사의 처형 후 자진 제대한 치바는 안 의사의 초상과 유묵을 불단에 모시고 매일같이 명복을 빌었고, 그의 사망 후에는 부인과 조카딸이 보관하다가 1980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기증했다.

안중근은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통역관도, 방청인도 일본인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가 편지를 썼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중략)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후략)"

일제 해방 후 친일 민족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 활동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친일파들이 제공하는 정치 자금을 거절하지 못한 이승만 정권이 반공을 위해 과거를 묻어뒀기 때문이다.
프랑스 나치점령기간 4년 나치협력자 처벌(사형) 6763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35년 친일파 처벌(사형) 1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이 뒤바뀌어 있다는 비판이 많다.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은 점점 늘어만 갈 것이다.
우리는 안중근을 바라는가. 이완용을 원하는가./김진효 경기도 문화유산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