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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인천을 읽다] 애관극장 그 골목집

류인채

2017년 08월 14일 00:05 월요일

그해 겨울
늦가을까지 담장을 기어오르던 마른 담쟁이 넝쿨이 철조망 같았다. 녹슨 양철 대문을 밀면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스무 개쯤 돌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 중턱에 맞닿은 처마, 처마 밑 들창, 지상과 맞닿은 창을 통해 발바닥과 먼 하늘을 보았다. 쪽마루의 부엌과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던 방 한 칸, 남동생과 나와 언니와 언니의 백수 애인까지 끼어들고 주말이면 동생 친구들이 대여섯씩 몰려와 석유곤로 위에서 부지런히 라면을 끓이던 날들, 극장에는 닥터 지바고의 포스터가 붙고 나는 찬밥을 말아 먹으며 답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었다. 주인집 아들의 검은 가죽 잠바 옆구리의 칼자국, 그 틈으로 밤꽃 냄새가 났다. 그가 버린 꽁초가 밤하늘을 가르며 포물선으로 떨어질 동안 나는 매일 뜨개질을 했다. 언니의 캄캄한 연애는 퉁퉁 불은 라면 같았고 오래 묵은 바위처럼 단단해지던 나의 사춘기, 나는 먼 세상을 읽기조차 두려웠다.


과거의 기억이란 때로는 너무나 달콤한 설탕과 같아서 그 속에 담겼던 쓴맛과 짠맛도 잊게 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이라는 그의 철학체계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욕망이라고 했다. 욕망은 인간을 대상과의 관계 속으로 끝없이 집어넣으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의 관계망 속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존재로 현성한다.<애관극장 그 골목집>은 '남동생과 나와 언니와 언니의 백수 애인/(……)주말이면 동생친구 대여섯/주인집 아들'들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늦가을 담장, 철조망, 발자국, 돌계단, 처마, (……)애관극장, 포스터, 칼자국' 등 인간과 사물의 관계로 조직되어 각각 실존적 정신과, 사물과 그것의 질의 정신으로 하나가 된 세계를 드러내고 의미를 생산한다. 주인집 아들에게서는 밤꽃 냄새가 났고, 극장에는 포스트가 붙고, 그가 버린 담배꽁초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동안, 화자는 뜨개질을 하고 답동성당의 종소리는 울린다. 세상은 너무나 아득해서 읽기조차 두려워지는 세상이고 그 속에서 사춘기는 단단해진다. 우리는 모두 지나온 과거의 한 순간의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 과거의 현상의 하나를 전범으로 삼아 그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면서 산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될 것이고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인데, 과거란 이토록 쓸쓸하거나 아련해져서 지금도 우리들 주위에는 이름과 모습만 바꾸어서 우리의 정서를 흔들어 깨우는 전범들이 너무나 많다.

/주병율 시인. 무크지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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