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SBS골프채널·MBC-ESPN 골프해설위원
지난 2주간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두 개의 여자프로 골프대회가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골프의 발상지로서도 유명하지만 바닷가를 끼고 펼쳐지는 링스코스에서 벌어져 강한 비바람과 맞서는 악천후 조건에서 선수의 체력과 정신력이 크게 좌우되는 대회로도 유명하다. 이 대회에서 한국의 두 선수가 약속이나 한 듯 2주 연속 우승을 일구어냈다. 그 우승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드라마처럼 연출되었고 그 환희와 감격의 순간은 마치 고전을 읽어내듯 우리 마음 속에 깃들고 있는 고사 성어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첫 번째 대회는 스코티스오픈으로 노스 에어셔의 던도널드 링크스코스 (파 72, 6390야드)에서 이미향 선수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 대회는 세계적 베테랑 선수인 미국의 크리스티 커(-4타), 호주의 카리 웹(-6타), 한국의 김세영(-6타)이 3라운드의 기록을 안은 채 최종 라운드를 선두그룹으로 나섰고 그들 중 한 선수가 우승할 것으로 모두 예상했다. 이미향 선수는 이븐파로 출발해 타수 차이도 크고 더욱이 비바람의 악천후 속에서 6타를 뒤집을 것을 예측하기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이미향은 최종일 버디 7개와 보기 1개를 묶어 66타를 기록한 반면 선두 그룹은 하나 같이 3라운드의 타수를 지키지 못하고 타수를 잃어버려 이미향에게 우승이 돌아갔다.

고전에 성동격서(聲東擊西)란 말이 있다. 동쪽을 말하고 서쪽을 치는 병법의 하나다. 모두 선두 그룹에 정신을 팔고 있던 그 순간에 다른 조의 이미향은 착실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러한 격동 속에 또 한 명의 한국 선수 허미정이 이미향의 뒷덜미를 또다시 노리고 있었다. 비교적 쉬운 마지막 홀은 이글도 노릴 수 있었던 곳이었고 16, 17번홀에서 버디만 했더라면 이미향과 허미정은 자칫 플레이오프로 갔을 수도 있다. 사마귀가 매미를 죽이니 참새가 뒤에 있더라. 매미 사냥에 성공한 이미향은 하마터면 사마귀, 허미정은 참새인 셈이 될 뻔 했다.

그 다음 주는 여자 골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티시오픈이 인근 파이프의 킹스반스 링크스(파72, 6697야드)에서 벌어졌다. '오뚝이' 김인경(29)이 5년 묵은 메이저 퀸의 한을 마침내 풀었다. 김인경은 합계 18언더파 270타로 정상에 올랐다. 2위 조디 유와트 섀도프(잉글랜드)를 2타차로 따돌린 김인경은 시즌 세 번째 우승으로 다승 1위에 나서며 제2의 전성기 도래를 알렸다. 김인경은 6년 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다가 작년 레인우드 클래식에 이어 올해 숍라이트클래식, 마라톤 클래식과 브리티시여자오픈까지 2시즌에 4승을 쓸어 담았다. 우승 상금으로 50만4821 달러(약 5억6842만원)를 받은 김인경은 시즌 상금이 108만5893달러로 늘어나 2013년 이후 4년만에 시즌 상금 100만달러 클럽에 복귀했다. 경기 중 2타 차로 쫓긴 사실을 알았으나 침착하게 파를 지키며 대범하면서도 착실한 경기운영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5년 전 ANA인스피레이션 최종일 경기서 30㎝ 우승 퍼트 실패로 연장전까지 허용하며 결국은 메이저 첫 승의 인연을 날려버린 후 아픔을 씻어내며 세계랭킹도 12계단 껑충 뛰며 9위로 도약했다.

사실 김인경의 5년 전 30센티 퍼팅 악몽의 사건을 기억하거나 그 내용을 자세히 아는 이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그 사건이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며 결정적 순간마다 패배를 거듭하며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리란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번 대회 언제 그랬냐는 듯 퍼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귀재의 멘탈을 시청하며 '김인경 퍼팅'이라 불러대던 세인들의 그 놀림은 이제 사라지고 퍼팅 잘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불리길 바란다.

그 사건이후 김인경은 인도네시아에서 명상과 요가, 단식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종교까지 가지며 '자책 대신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고 따뜻해지려 노력했다'고 한다.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이긴다는 뜻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있다. 김인경의 5년에 걸친 와신상담은 비로소 편한 잠자리와 달콤한 시간을 주기에 충분한 인내와 각고의 시간이라 여겨진다.
골프를 포함해 스포츠 세계는 한 치 앞의 승부를 예측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각본 없는 드라마에 열광한다. 스포츠 세계에서 인생의 단면을 느끼고 인문학에 견주어 보는 것에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