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내가 본 그곳은 격렬하고도 상냥했다
'코넬리어스 오스굿'(Cornelius Osgood, 1905~1985) 세계적인 인류학자로 미국 예일대교수를 지냈다. 그가 1951년 펴낸 (한국인과 그들의 문화)는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강화도를 통해 우리나라를 최초로 주목한 연구서다.

1947년 강화도에서 현지 조사를 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오스굿은 한국인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영국인들과 달리 오히려 감정적 판단을 하는 아일랜드인과 유사하다며 '오리엔탈 아이리시'라고 불렀다.

오스굿은 "한민족이 예로부터 무천, 영고, 동맹 같은 축제를 통해 가무에 도취했던 역사가 있다"며 한국인들이 통음하고 포식하고 노래를 잘하고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은 '구강 가학적 경향을 가진 오럴 사디스트(oral sadist)이며 입으로 먹고 입에서 뱉는 일을 모두 격렬하게 하는 기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굿은 1934년부터 1973년까지 예일대학교 피바디박물관 인류학 큐레이터를 지내며 한국, 중국, 북극의 현지 연구를 통해 상당한 자료를 박물관에 소장했다. 그는 알래스카 내륙의 아타파스칸(Athapaskan) 어군(語群)을 사용하는 인종에 관한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상당량의 결과물이 예일대 출판부의 인류총서 시리즈로 간행됐다.

강화도 선두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속을 살펴본 오스굿을 가상 인터뷰했다.


▲강화도 선두리는 무슨 이유로 어떻게 찾은 것인가

―나는 인류의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다. 내가 강화도 선두리를 찾은 때는 1947년 여름이었다. 나는 한국을 연구하고 싶었고 바람직한 지역에 대한 심사숙고하던 중 문헌연구를 통해 세 지역 가운데 한 지역이 만족스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한반도 남동부에 있는 고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근방이었다. 그러나 경주는 수천 년 동안 수도권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에 대한 고민의 결과 세 번째의 선택이 강화도였다.

강화도는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 상징적으로 한국적이라는 선입관이 배어있는 곳이다. 강화도는 하늘에서 내려와 모든 한국인의 시조가 된 단군이 마리산에 제단을 차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몽고 침략자들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최후의 피난처로 선택한 섬이며, 프랑스와 미국이 들어와 접촉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한국은 원래부터 농경국가이고 인구의 5분의 4 정도가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문화에 두루 알기 위해서는 원론적으로 국가가 기록한 개인의 자료를 포함해 행동과 생각의 전모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표본채집은 사회과학에서 중요한 수단이고 인류학자는 연구를 위해 국가의 문화적 단편들을 선택함으로써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연구단위는 마을 또는 부락이다. 그래서 강화도 선두포를 선택했다.


▲강화도 선두포 연구 뒤 그 결과를 1951년 책으로 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신이 펴 낸 (한국인과 그들의 문화)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이 책은 강화도 농경마을의 생활에 대한 연구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전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한 것이다.

수록된 글들은 1947년 여름에 (강화)지역의 조력자들과 나의 관찰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강화도에 대한 전반적 소개, 선두포 마을과 환경, 마을의 사회적 구성, 마을의 경제와 삶, 개인의 삶, 종교와 죽음 등으로 짜여졌다.


▲당시 전등사와 선두포는 어떤 모습이었나

―전등사로 들어가는 한 길은 산등성이를 넘어 강화도 남부의 주요 마을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 곳에선 지역 학교와 5일마다 농부와 상인들이 만나 서로 필요한 물품들을 교환하는 장이 섰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마을이 행정체계의 가장 낮은 단위, 즉 일선 경찰과 행정 관료들을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는 점이다. 마을은 민주적인 지역단체와 행정 관료가 만나는 접견 장소였다.

공회당은 지역사회와 외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됐다. 절에서부터 반대편 문으로 오르는 길은 보호벽 사이 마리산 비탈 뒤로 선명하게 보이는 황해의 수평선 높이로 연결돼 있다.

소나무의 낮은 가지들은 가지치기가 돼 있었고 잔디의 아래편에서는 야생화들이 자랐다. 길을 절반 정도 내려오면 한 무리의 초가지붕들이 아래 쪽 푸른 논과 빛바랜 노란색의 경계선을 펼쳐 놓는다.

이 농경지들은 수세기 전 바닷물을 막기 위해 해안 언덕에 제방을 세웠을 때 간척된 땅이다. 우리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언덕길에서 아랫마을로 걸어들어갔다. 아주 작은 손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마저도 이 고립된 지역을 다른 지역으로 연결해주지 않았다. 이같은 사정은 우리의 목적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유교에 심취해 있었으며 거의 모든 남자가 집 앞에 펼쳐진 논에서 벼농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는 광복 이후라 한국의 상황이 매우 복잡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게 된 것인가

―㈜바이킹 펀드(The Viking Fund)의 경제적 도움으로 진행된 예일대학과 피바디 자연사박물관의 연구 조사 프로그램의 일부분으로 진행된 것들이다. 우선 한국에서 24사단을 이끌던 호지(John R. Hodge) 육군 준장 같은 분들이 공정한 조사를 위해 특별한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복잡한 관료적 문제가 긴장을 일으키는 시기에 한국에서 조사를 실행할 수 있도록 협력해 준 미 국무부와 육군본부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한국인 친구 중에서는 국립박물관 관장이던 김채원 박사가 특별한 도움을 주었다.

또 1947년 여름 친절하게 숙식을 제공해 주신 전등사 김영섭 주지스님도 잊지 못 할 분이다. 그 스님은 우리가 갔을 때 우리 일행이 원하는 만큼 머무르면 그도 기쁘겠노라고 이야기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전등사에 베이스캠프를 차릴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김우식, 한표규 두 학생이었다. 우리가 강화도에서 함께 지내고 일하는 동안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연구방법은 어떤 것이었나

―우리는 전등사에 머물면서 인근 지역에 대한 일반적인 조사와 방법, 절차에 대한 긴 세미나를 가졌다. 우리의 목표는 한 마을을 가능한 완전하게 공부해 보는 것이었다.

같은 '리' 안에 있는 다른 마을과 비교되는 데이터를 포함해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동시에 그 지역의 모든 마을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해주는 교육, 정치, 경제와 같은 요인들을 참고로 해 '읍'에 대한 특별한 분석을 해 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 학생은 읍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다른 멤버들은 나와 함께 우리의 근거지 마을에 대한 분석작업을 했다.

유용하고 좋은 정보들을 얻어가며 한 주, 한 주가 흐르고 가끔 강화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의 동료들도 이 조사의 결과들에 대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우리는 작은 등불 아래서 졸린 눈을 비볐다.

한 달이 지나자 우리는 같이 먹고, 마시고 웃었으며 장례식에도 함께 갔다. 때로는 비밀을 나눠 갖기도 했고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여름이 끝나기 전 경찰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트럭에 가득 싣고 감옥에 몰아넣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더 행복했을텐데 고통에 찬 눈으로 마당에서 달빛을 바라보던 백발노인들의 침묵은 잊을 수가 없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세상에 없음에도 내 연구를 바탕으로 인천일보가 특별기획을 진행한다는 사실에 기쁘다. 내가 연구했던 강화도와 선두포, 그리고 70년 만에 보는 선두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하는 것도 무척 재밌을 것 같다. 강화도와 인천, 인천일보의 발전을 기원한다.

/글 사진 김진국 기자·그림 유사랑 화백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