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리와 화평리 사이에 가로 막아 있는 바다 제방의 수문이 6일 정오에 터져서 거칠 새 없이 때마침 일 년 중에 제일 높게 밀물 드는 백중사리의 거침없는 조수에 그 제방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일대의 4백여호는 침수되었다.' 1933년 8월 7일 동아일보 석간 속보 내용이다. 이를 보도한 이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다. 그가 언급한 수문의 제방은 그 시절 이미 속칭으로 널리 불렸던 '수문통(水門通)'이다.

수문통은 만석동 괭이부리에서부터 들어오는 바닷물이 들고나던 갯골 수로였다. 현재의 화평파출소와 송현파출소 사이 약 400m 거리다. 필자는 이곳 인근에서 태어나 자랐다. 물때 따라 이곳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작은 돛단배들을 보곤 했다. 배짱 좋은 친구들은 수문통으로 다이빙하며 멱을 감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공을 산 적이 없다. 여름철 장마 때마다 전동, 인현동 등 윗동네에서 놀다가 하수구로 빠진 공들이 이곳으로 모두 떠 내려왔다. 필자는 수문통 옆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매립한 터에 세운 학교라 종종 백중사리 때 바닷물이 역류해서 교실까지 밀려들어왔다. 물이 찰랑거리는 복도에서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쫓아다닌 적도 있다. 수문통은 20여년 전 완전 복개되었다.

요즘 수문통 사람들이 시름에 차있다. 동네 땅 밑으로 제2외곽순환(인천~김포)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지하터널 발파 공사로 집이 균열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장대비가 내린 며칠 전 한 아파트 곳곳에 크고 작은 싱크홀(땅꺼짐)이 발생하기도 했다. 입주민들은 수문통의 물이 스며든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수개월째 인천시와 청와대 등을 오가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네사람들은 한 때 이 수문통을 '세느강'이라고 불렀다. 결코 풍요로운 삶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빈곤 속에서도 그렇게 늘 낭만을 꿈꾸며 살았다. 동네 땅 밑의 고속도로는 졸지에 그들에게 폭풍 속 백중사리로 다가왔다. 수문통사람들은 인천시가 거센 바닷물을 막아주던 든든한 제방의 수문이 돼주길 간절히 바라며 이 염천(炎天)을 보내고 있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