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태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세상엔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게으름과 여유로움, 남녀간의 우정과 사랑, 로맨스와 불륜 등등. 칭찬과 아부도 그 경계가 확연치 만은 않다. 그렇다고 같은 류(類)도 아니다. 실제로 아부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다.

우선 같은 칭찬이라도 듣는 사람만 기분이 좋은 건 아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반면 칭찬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또한 그 사람이 실제로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칭찬을 하면 그건 아부에 속한다. 하지만 칭찬은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매우 잘했을 때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부에는 목적이 있지만 칭찬에는 목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칭찬과 아부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러함에도 이 둘을 칼로 딱 잘라 구분해 조금 잘한 일을 두고 크게 칭찬해주는 것은 가식이 아니냐고 굳이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식 또는 아부라기보다 일종의 '테크닉'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생각해 보자. 공부를 하는데도 테크닉이 필요하고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데도 역시 테크닉은 반드시 요구된다. 그런데 왜 인간관계에서는 테크닉을 쓰면 가식이고 위선이며 심지어 아부라고 곡해하는가? 세상에 인간관계만큼 가장 섬세한 테크닉이 필요한 관계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적절한 아부는 조직생활을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이자 삶의 활력소가 된다. 누군가에게 매력적이라는 칭찬을 해주면 실제로 그 사람은 훨씬 더 밝아지고 매력적이 된다. 바로 아부의 순기능이다. 미국 타임誌 편집장 출신이며 <아부의 기술>을 쓴 리처드 스텐걸은 아부의 4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칭찬과 동시에 부탁은 하지 말라" "본인이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아부만 잘 한다고 출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사회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 적지 않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의외로 아부에 약하다 한다. 많은 지도자들은 가끔은 아부인줄 알면서도 애써 아부라고 여기지 않고 그러한 평가를 해주는 상대방의 안목이 뛰어나다고 받아들인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아부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칭찬과 함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결단을 어떻게 하셨습니까?"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영원한 우상인 링컨이 암살자에게 저격당하고 죽었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신문 조각이 나왔다. 그 신문기사에 빨간색 밑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바로 링컨 자신을 칭찬한 내용의 아부성 기사였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도 아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아부를 좋아한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은 칭찬을 받으려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모든 사람의 가장 큰 욕구는 칭찬을 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찬의 물방울을 기다리는 마른 스펀지와 같다"고 주장한다. 팍팍한 삶에 칭찬인지 아부인지 명확히 구분하고 판단하기 어렵다면, 망설이지 말고 아부의 편에 서서 아부성 칭찬의 말을 건네는 것도 일종의 테크닉이다. "아부하는 말은 믿지 않지만, 아부하는 사람은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