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건국 1100주년 … 단독자료 바탕 연재
▲ 2017년 여름, 선두리어판장 앞 전경.
내년은 '2018 올해의 관광도시 강화'의 해이자 고려가 건국한 지 1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가 다시한번 강화도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천일보가 창간 29주년 특별기획으로 준비한 '1947 선두포, 강화의 어제와 오늘'은 본보가 단독입수한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코넬리어스 오스굿'(Cornelius Osgood, 1905~1985) 미국 예일대 교수의 1951년 연구서 를 바탕으로 진행한다.

오스굿은 우리나라에 아직 문화인류학이란 학문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때 강화도 선두리에 와서 민속과 사회를 살펴보고 그 결과를 꼼꼼히 기록했다. 그의 연구는 이후 세계학회에 보고됐으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오스굿의 연구 이후에도 강화도 사람들의 근현대 문화와 삶에 대한 학문적 고찰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를 과거엔 '뱃머리 나루'란 뜻의 '선두포(船頭浦)'라고 불렀다.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를 만들기 전까지 포구였기 때문이다. 1947년 한국을 연구하기 위해 강화도를 선택한 오스굿은 그 이유를 "강화도가 한국의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 한국적 상징성을 잘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바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강화도가 한국인의 시조인 단군이 마리산에 제단을 차렸고, 몽골 침략자들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최후의 피난처로 선택한 섬"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는 세계적 인류학자가 보기에도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땅보다 영험한 기운을 가진 '민족의 성지'이며, 몽골이란 대제국을 막아낸 '최후의 보장처'란 사실을 깊이 인식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스굿은 이 기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에 머물면서 강화도에 대한 전반적 인상과 선두포 마을의 환경, 마을의 사회적 구성, 마을의 경제와 삶, 개인의 삶, 종교와 죽음까지 살펴보았다.

정확히 70년이 지난 강화도의 2017년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다. 3만1316가구에 6만8127명의 사람이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28.9%가 65세 이상이다. 인천시의 40%에 속하는 411㎢ 면적에 1읍·12면·186개리가 분포돼 있다. 강화군은 통일시대 수도권의 관문도시이자 남북한을 연결하는 서해안 경협벨트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중이다. 인천일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70년을 오가는 선두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고 우리나라 섬마을, 인천,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현대 풍속을 되돌아볼 계획이다.

광복 직후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던 사실을 볼 때 그의 연구는 강화도는 물론 인천, 1947년대 우리나라의 풍속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화도와 인천, 나아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