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곤지암
소머리 국밥, 화담숲으로 유명한 광주 곤지암은 바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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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암읍에 크고 작은 2개의 바위가 있는데 벼락을 맞아 갈라진 바위틈에서 자라났다는 400년 묵은 향나무와 함께 있다.
주변에 연못도 있었는데 지금은 학교와 주택가로 변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이 바위에는 신립 장군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조령(문경새재)에 매복했다가 기습공격하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뿌리친 신립. 그날 밤 아내로 받아줄 것을 거절당하자 자살한 처녀가 신립의 꿈에 나타나 '어찌 험산에서 포진을 하려고 합니까. 저 넓은 충주평야로 적을 유도해서 초개처럼 섬멸시키는 것이 천하명장의 기개라고 생각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에 신립은 자신의 주특기인 기병전을 펼칠 수 있는 충주 평야에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이 지역은 농경지로 개간돼 말을 몰기가 쉽지 않아 일본군 조총 앞에 기병부대가 맥없이 쓰러졌다. 신립은 탄금대 북쪽 절벽(열두대)에서 뜨거워진 활시위를 12번 강물에 식히며 싸웠지만 결국 강물에 투신해 자결하게 된다.
이후 시신은 찾지 못하고 그의 옥관자(玉貫子)만 찾아 지금의 묘가 있는 광주 신대리에 왔는데, 묘자리가 쥐혈인데 묘 건너편에 고양이 형상의 바위가 있어 묘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광풍이 불고 벼락이 치더니 고양이 바위가 두 동강이 나고 그 앞에 연못이 생겨 고양이 형상이 없어지게 되니, 비로소 묘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렇게 갈라진 바위는 곤지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신립은 천혜요새인 조령을 버린 무능한 장군으로 평가받아 오다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
그 이유는 조령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을 막더라도 2·3군이 우회해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으므로 충주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과 급하게 모집된 농민군으로 일본 정예병과 맞서려면 배수의 진이라는 극단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도망가기 바쁜 상황. 신립은 그와 평생을 함께한 기병대, 농사밖에 모르던 농민들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누가 쉽게 판단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