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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원의 사람냄새]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와 환관 정화(鄭和)    

2017년 07월 11일 00:05 화요일
대항해 시대는 언제 처음 시작되었을까?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거의 1세기 앞선 1405년 7월11일 명나라 환관 정화(鄭和, 1371~1433)는 2만 7800여명의 선원, 보선(寶船) 62척을 포함해 240여척에 이르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원정항해에 나섰다. 보선은 길이 44장 4척(151.8m), 폭 18장(61.6m)에 이르는 대형 돛이 9개나 달린 대형 선박이었는데, 이 선박의 규모는 오랫동안 중국 특유의 과장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난 1957년 11m에 이르는 키가 발굴되면서 사실에 근접한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화의 선단 규모를 오늘날 미 태평양 함대에 비유한다면 콜럼버스의 선단은 소말리아 해적에 비유해야 할 만큼 작았다. 정화는 이후에도 일곱 차례에 걸친 원정을 통해 신대륙에도 도달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콜럼버스를 기억할 뿐 정화는 기억하지 못한다.
15세기까지 서구에 앞선 선박 건조술과 항해능력을 갖춘 해양선진국이던 중국은 이후 황제의 명령으로 해외 원정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정화의 원정은 급작스럽게 중단되었을까?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그 원인으로 당시 명나라 사대부 관리들의 보수주의를 지적한다. 그러나 단지 보수적 관료들 때문이었을까? 정화의 항해를 일러 수수께끼 원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토록 엄청난 비용과 인원이 동원된 항해가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명나라가 얻은 이익은 단지 황제의 과시욕을 충족시키는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 조정의 주요관심사는 원의 지배로 훼손되었던 유교적 중화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명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달성된 이후에는 고비용 저효율의 해외 원정을 거듭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근대 르네상스 이후 시민세력이 성장해가던 서구와 달리 중국은 정화의 원정을 뒷받침해줄 배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황제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던 원정은 손쉽게 황제의 명령으로 중단될 수 있었다. 비록 선단의 규모는 정화가 비할 바 없이 컸지만, 근대의 정신을 가진 주체의 차이, 생각의 차이가 동서양 세계의 명운을 갈랐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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