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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능현리에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정몽주 선생 묘(사진)가 있다.

풍덕군(개성 바로 밑 경기도 경계 지점)에 있던 정몽주 선생 묘를 고향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명정(죽은 사람의 신분을 기재하여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기)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에 안장한 것이다.

신도비(죽은 사람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에는 고려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만 쓰고, 조선 태종 때 추증된 영의정은 기록하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기린 것이다.

정몽주는 어머니 이씨가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떨어뜨리는 태몽을 꿨다고 해서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아홉 살 때는 어머니가 낮잠에서 검은 용이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정몽주가 있었다고 해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

이후 성년이 되자 몽주(夢周)로 다시 고쳤다.

정몽주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이자 뛰어난 외교가였다.

하지만 친원파들은 명나라 사신을 죽인 후 명 태조 생일이 60일 남은 시점(명의 수도 남경까지는 90일 정도가 걸린다)에서 정몽주를 사신으로 추천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에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밤낮을 달려 명 태조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된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정몽주는 고려 개혁에는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면서도 역성혁명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정몽주는 선죽교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피를 뿌렸다.

선죽교는 정몽주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선지교에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지 않다면' 현실주의자다. 재물·권력에 적합하다.

하지만 '일 백번 고쳐 죽더라도 뜻을 버릴 수 없다면' 이상주의자다.

정신적 행복을 위해 기꺼이 고달픈 현실을 감수한다.

어떤 경우에도 극단적이라면 둘 다 위험하다.

통 큰 이해와 협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