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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伴鷗亭·사진). '갈매기를 벗 삼아 노니는 정자'란 뜻으로 명재상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곳이다.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967년 재건했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데, 맑은 날에는 황희 정승의 고향 땅 개성 송악산도 볼 수 있다.

황희는 고려 멸망 후 개성 두문동에서 두문불출하던 중 '태조(이성계)는 밉지만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는 고려 신하들의 추천으로 조선에 합류했다.

황희는 강직한 성품 탓에 태조와 정종에게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 황희를 태종(이방원)은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이 많지만 정작 쓸려고 하면 마땅한 인물이 없다.

어디에도 황희 같은 인물을 찾기 어렵다"며 신임했다.

하지만 황희는 양녕대군 세자 폐위에 강력히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샀고, 삭탈관직된 채 파주(교하)로 유배됐다.

이후 태종의 강력한 추천으로 복귀하게 됐고,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반대했던 세종과 함께 전성기를 이루게 되니 '세종 같은 임금에 황희 같은 정승'이었다.

조선의 최장수(24년) 재상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황희 정승은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했으나 '인간의 굴레'까지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사위가 지방 관아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다 탄핵되기도 했다.

또 간통한 사실을 알고 있는 종을 죽이고, 자신의 집 마당 토굴 속에 숨어 살던 박포의 아내와 간통했다.
권력을 집중시킨 후 남용하지 말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슈퍼맨이나 성인군자가 아니고, 그렇기를 바라는 것도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갑질'이 불가능하도록 법규나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시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