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 장교 부정부패 10만명 아사...생존자 심재갑옹 생생한 증언
▲ 6·25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한 심재갑(85)옹이 전쟁당시 매일 쓴 일기를 보여주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6·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인천을 비롯한 전국의 젊은 애국청년들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쓰러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고위 장교들의 부정부패로 10만여명의 장정들이 굶주려 사망한 '국민방위군'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전쟁 가운데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 정부의 무책임이 빚어낸 역사적 대참사로 꼽힌다. ▶관련기사 19면

1950~1951년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계속되자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만 17~40세의 장정들을 징집했다.
김윤근 대동청년단 단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 부사령관에 자리했다.

국민방위군 생존자인 심재갑(85)옹에 따르면 인천에서도 1951년 1·4 후퇴 전날인 3일, 남쪽 후방으로 보낼 국민방위군 징집이 시작됐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장정들이 하나 둘 동인천 축현초등학교로 모였다. 이들은 연안부두에 도착한 일본 상선을 타고 제주도로 향한다. 제주도의 초등학교는 장정들의 터전이 됐고, 20명이 들어가도 꽉찰법한 교실에 200여명이 주둔했다.

북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장정들을 향한 대우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군복은 물론 식량보급도 받지 못했다. 군 장교와 간부들은 장정 식비와 의약품·장비 구입비용 24억원과 쌀 5만2000가마를 유용했다. 지금 가치로는 따질 수도 없는 엄청난 돈이 탐관오리에게 흘러갔다. 국가라는 이름 하에 벌어진 부패와 부조리였다. 심옹은 "제주에서만 하루에 10명이 넘는 장정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다 사망했다"고 전한다. 전국적으로 아사자와 동사자는 10만여명을 웃돌았다.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망자와 실종자 수조차 파악되지 않아 유족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정부에 실태조사와 보상 및 사과 위령제 추진, 유해발굴 등을 요구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뤄지지 않았다.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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