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제물포해전 발발 당시 상황(인천부사, 1933)
제물포해전은 러일전쟁의 서막이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8일, 일본함대가 뤼순항旅順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 강화를 맺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그런 와중인 1904년 2월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본격적인 러일전쟁의 시작인 '제물포해전'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과 만주의 분할을 둘러싸고 양자간 힘겨루기를 한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과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는 1860년대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를 획득한 뒤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한국과의 본격적 관계가 이루어졌다. 1884년 한·러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러시아의 영흥만 조차(租借)가 가능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조선으로부터 광산채굴권(경원, 종성)과 삼림벌채권(압록강 연안, 울릉도),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을 얻었다.

한편, 청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새롭게 일본의 지배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서 등장했다. 거기에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친러정부가 수립되고 친일파를 추방해 버렸다. 소위 아관파천이다. 조선에서 일본은 고립되고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은 증대했다.

러시아는 1902년 10월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제물포에 러시아 부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관 신축 후 영국계 홈링거 양행에 위탁했던 '동청철도기선회사'의 사무소와 '블라디보스토크 목재회사' 등을 영사관 내에 두는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를 거듭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패배로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영사업무도 종료됐다.

1904년 당시 인천항은 국제항으로 여러 나라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러시아 군함 2척(바리야크, 코레츠)과 여객선 1척(숭가리)이 입항해 있었다. 러일전쟁은 2월8일 여순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고, 인천항의 두 러시아 군함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 전투태세 역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이 조선의 기간 전신망인 경의전선과 경인전선을 전쟁 전부터 불법적으로 장악하고 이 전신선을 차단하여 정보의 전달을 막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 10일에야 러시아에 선전 포고했다.
2월9일 오전 10시 일본함대사령관의 최후통첩을 받은 러시아 군함의 두 함장은 협의 끝에 교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소월미도 부근에 정박 중이던 두 군함은 닻을 거두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일본함대가 대기 중인 팔미도를 향해 항진, 팔미도 부근에서 전투가 전개됐다. 양측의 군함들은 약 40분간 포격전을 벌였는데 러시아 군함들은 큰 손상을 입고 패주하다가 다시 소월미도 부근으로 들어와 정박했다.
일본 군함에 포위된 러시아 군함들은 일본군에게 함선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항복하지 않고 오후 4시경 코레츠호가 먼저 자폭하고 이어서 5시경 바리야크호가 자폭했다.
항복을 하면 이들 군함은 전리품이 되어 일본의 군비가 증대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앞서 8일 상해로부터 입항했던 동청철도공사 소속 기선 숭가리호도 자폭해 모두 3척의 러시아 선박들이 인천항 부근에서 침몰했다.
제물포해전 후 일본인들은 1905년 2월9일을 인천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2015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있던 바리야크호의 함상기는 11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시 문화재로 지정됐다. 2017년 현재, 동북아 정세는 실리 외교를 요구하고 있다. 과거 인천이 경험했던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