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일본인촌 한복판서 '의술' 펼쳤다
▲ 인천시 중구 중앙동 4가 1의 1 자리에 있던 '신외과'(愼外科)는 일본풍의 2층 건물로 1층은 진료실과 수술실, 마을공동우물이 있었고 2층은 문화살롱처럼 운영됐다. 신외과 앞에 폭스바겐으로 보이는 자동차가 있고 입구엔 소녀가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 신외과는 1942년 개원해 1980년까지 운영됐다. 지금 이 자리엔 5층 건물이 들어섰는데 1층 활어초사란 식당, 2층 커피숍 페미니스트, 3층 떼아뜨르 다락소극장, 4층 휘트니스짐이 영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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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범 박사, 1942년 10월 중구 중앙동에 '신외과' 개원
40여년간 그 자리에...지금은 5층 벽돌건물 우뚝


"쾅 쾅 쾅! 선생 니~임! 선생 니~임!"

새벽 2시, 한 여인의 절규가 신포동의 적막을 깨트렸다.

아이를 안은 여인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삐이~걱"

조금 뒤 전등이 켜지고, 문이 열리더니 거구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배우처럼 얼굴이 하얗고 헌칠한 외형의 소유자였다. 남자는 하얀 가운을 주섬주섬 걸치는 모습이었다.

"의사선생님 제 아이가 다 죽어 갑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이의 눈이 풀렸나 살펴보던 의사는 곧바로 아이를 안아 병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새벽시간 수술실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천시 중구 중앙동 4가 1의 1 자리엔 일본풍의 2층 건물이 있었다. 2층 건물모서리에 '愼外科'(신외과)란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었다. 외과의사 신태범(1912~2001) 박사가 운영하던 외과의원이었다.

신외과는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꼭두새벽이라도 환자들이 달려와 문을 두드리면 그 때가 문 여는 시간이고, 환자가 좀 없다 싶으면 그 때가 쉬는 시간이었다. 병원 개원시간 외에도 병원을 찾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던 그는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휴머니스트 의사'로 통했다.

그가 일본인촌 한복판인 중앙동에 '신외과' 간판을 처음 내건 때는 1942년 10월이다. 이후 병원셔터를 내린 1980년까지 40년간 그는 한 자리에서 인술을 펼쳤다. 광복과 한국전쟁과 같은 한국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신외과는 신포동 한복판에서 꺼져가는 무수한 생명들을 소생시켰다.

1936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신 박사는 1942년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병원을 지으려고 했으나 태평양전쟁이 터진 직후여서 신축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쓸만한 건물을 찾아나섰는데 한국인들이 사는 마을엔 마땅한 건물이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은 게 일본인촌 한복판에 있던 '평야상점'(平野商店)이다.
1920년 초에 지은 496㎡(150평) 규모의 2층 건물이었다. 당시만 해도 점포, 창고, 주택을 겸한, 요즘으로 치면 복합상가라 할 수 있었다.

신 박사의 장남 신용석 선생은 "선친께서 경성제대 의학부 7회 졸업생이셨는데 학생 70명 가운데 한국인은 예닐곱명 밖에 없었다고 들었다"며 "졸업한 뒤 서울 종로에서 김성진외과를 하던 선배가 오라고 했지만 인천에서 조부를 모시고 살던 선친께선 인천서 개업하겠다며 고향인 인천에 신외과를 차렸다"고 회상했다.

신외과엔 맹장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3대에 걸쳐 맹장수술을 받은 환자집안이 있을 정도였다. 인천은 물론이고 인근 도시에서도 신외과를 찾아왔다. 강화도, 영종도에서부터 충남 서산, 당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광역의료기관이었던 셈이다.

신외과엔 수술비 대신 땅문서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돈이 없다보니 땅문서를 맡기고 치료를 받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매년 신외과에선 '땅문서 전달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땅문서를 맡기고도 치료비를 못 갚아 땅문서를 찾아가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럼 아버지께서 땅문서 맡겼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열심히 살라고 하면서 땅문서를 돌려주시는 겁니다. 그 때 돌려준 땅문서만 모았어도 인천땅은 거의 저희집 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허 허."(신용석)

신외과 2층은 문화공간이었다. 로맨티스트였던 신태범 박사는 종종 지인들을 2층으로 초청해 요리를 해주고, 책 읽고 토론도 하며 의사로서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렸다. 문학과 음식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먹는 재미, 사는 재미>란 음식책을 펴내기도 했다. 문필가나 외교관이 꿈이었던 그였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아픔은 그에게 의사란 직업을 강요했던 것이다.

물이 귀하던 시절, 신외과는 제물포 사람들의 '공동수돗가'이기도 했다. 병원 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툭 하면 물을 길러 병원을 찾았던 것이다.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사이를 비집고 낑낑대며 들어가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때로는 소방수들이 소방수로 쓸 물을 퍼 가기도 했다고 신용석 선생은 회상했다.

신외과가 있던 자리엔 지금 붉은 벽돌의 5층 건물이 우뚝 서 있다. 1층은 활어초사란 식당, 2층은 커피숍 페미니스트, 3층은 떼아뜨르 다락소극장, 4층은 휘트니스짐이 활발히 영업 중이다. 건물을 마주하고 서자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환청이 들려온다. 저 문을 열고 헌칠한 의사가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만 같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