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걸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능허(凌虛)는 '허공을 가르다'라는 뜻으로 중국의 위진시대(220년~420년)이래 사용됐던 용어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전기 이래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조망이 좋은 냇가와 호수 주변이나 절경의 해안가 누각에 주로 붙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능허라는 명칭은 울진의 능허루, 태안의 능허대 등지에도 나타나듯, 어떤 지역의 누구든 차용할 수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해 있었던 능허대(凌虛臺)는 인천 능허대라고 지칭해야 여타의 지역 그것과 변별될 수 있을 것이다.

인천 능허대는 백제가 378년(근초고왕 27년)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던 475년(개로왕 21년)까지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했던 나루터인 한나루[大津]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백제와 중국과의 교통로는 고구려로 인하여 육로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탔던 곳이 바로 능허대 밑의 한나루였다고 한다. 백제의 사신들이 능허대에서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아래에 있는 한나루에서 때를 맞추어 배를 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인천의 능허대는 다른 지역의 능허대와는 달리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지역에는 능허대와 관련한 설화가 몇 편 전해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사모지 고개[三呼峴] 설화>이다. 사모지 고개는 연수구 청학동에서 남구 문학동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위치한 고개로, 현재 문학터널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 중국을 오가던 백제의 사신들이 위례성으로부터 남동구 만수동의 이별고개[星峴]를 경유하여 능허대 포구로 가기 위한 길목이었다. 백제 사신들은 위례성으로부터 배웅을 나온 가족들과 이별고개에 이르러 작별을 하게 된다.

그 후 가족들과 작별한 사신들은 이별고개가 잘 보이는 사모지 고개에 이르러 배웅나온 가족들을 향해 바라보며, 그곳에 있는 가족들을 세 번 부른 후 능허대로 향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고개는 '세 번 불렀다'는 의미의 '삼호현'으로 불리다가 후에 사모지 고개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사모지 고개는 능허대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로는 바닷길을 건너가는 험난한 사행길이었기에 이와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인천부읍지>에는 능허대와 관련하여 기암(妓岩) 설화가 전해진다. 백제의 어떤 사신이 능허대에서 중국으로 떠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한 기녀와 깊은 정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순풍이 불어 사행길을 출발하게 되자, 이별의 정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능허대 인근의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후 사람들은 기녀가 몸을 던져 죽은 바위를 기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암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중엽 김정호의 <동여도>나 <대동여지도>에는 능허대 앞바다의 섬 용유도 해변에 여기암(女妓岩)이라는 표시가 있어 주목된다.

여기암은 오늘날 선녀기암, 또는 선녀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위치한 곳이다. 이 바위에는 선녀와 총각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선녀가 바위 총각을 만나 결혼했다. 1년 후에 옥황상제가 다시 선녀를 불렀으나 총각을 사랑한 선녀가 이를 거역하고 만다. 이에 옥황상제가 벼락을 내리자 두 사람은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선 채로 벼락을 맞아 한 몸의 바위가 됐다"는 이야기다.

이곳에는 이 설화 외에도 몇 개의 설화가 더 전해지는데 그 중 다음의 설화가 주목된다. "용유도는 고려시대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내왕하는 길목이었다. 개성의 벽란도를 출발한 사신들은 배를 타고 이곳 용유도에 이르러 하루를 묵고, 덕적도를 거쳐 중국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이때 한 사신이 용유도의 기녀와 정이 들게 되었다. 며칠 후 사신이 임무수행을 위해 떠나자 그 기녀는 이별의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 그 포구의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 그런 연유로 그 바위를 요파기암이라 불렀다"는 설화이다. 앞의 기암설화와 시대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능허대와 관련한 기암이 용유도의 기암과 같은 곳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고려시대의 경우처럼 백제시대 때도 사신들의 사행길이 능허대의 대진을 떠나 용유도를 거쳐 중국으로 갔을 것이기에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설화에서 보면 인천 능허대는 삼국시대 이래 대 중국교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점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해양도시 인천으로서는 이러한 중요한 콘텐츠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 해당 지자체에서는 능허대 축제를 진행하고 있으며, 설화를 바탕으로 한 공연콘텐츠가 개발되는 등 능허대에 대한 상징성을 부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이 충실한 고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고대 해양교역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는 인천 능허대, 충실한 고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시작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