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교동'은 연산군 광해군 안평대군 등 조선의 왕족들이 유배생활을 했던 절해고도의 섬이다. 지리적으로 황해도 연백과 마주보고 있는데, 수년 전까지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최근 교동대교가 개통돼 비교적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섬이 되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도 아름다운 섬 '교동'을 찾기를 즐겨, 이곳 화개사에 친구와 머물며 학문수양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교동'이라는 몇 편의 한시를 남기고 있다.

동해안 영덕의 괴시리라는 선비골에서 태어난 목은은, 높은 혜안으로 여러 차례 원나라, 명나라 등으로 유학하여 대학자의 반열에 오른 사상가이자, 고려 3은(목은, 야은, 포은) 중 하나이다. 동해안에서 태어난 그가 서해 앞바다 교동을 찾아와 학문정진의 한 시기를 보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세월이 흘러가도 명경지수를 찾아 자연과 함께하고자하는 선지자들의 발길은 변치 않나 보다.

그러나 이색은 조국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개국되는 것을 아프게 목도하며 지켜보던 인물, 조국의 흥망성쇠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던 정신적 안식처가 교동은 아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교동의 '바다는 끝이 없고 푸른 하늘은 낮'은데, 인간의 역사는 아프고 아프게 흘러 지금의 분단에 이르고 있음을 교동은 기억할 것이다.

그가 돌아간 지도 어언 육백여년,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란 그의 시조는 아직도 남아 인구에 회자되는데, 오늘도 교동도의 고기잡이배들은 짙은 해무 아래 쓸쓸히 남방한계선을 맴돌고 있다.

/권영준 부개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