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하대 강사
▲ 안정헌 인하대 강사
철도의 발명은 단순히 운송수단의 변화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혁이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에서 상영된 세계 최초의 영화는 <시오타에 도착하는 기차>이다. 루이 뤼미에르가 제작한 이 영화는, 카메라를 역 플랫폼의 가장자리에 설치해 놓고 마르세유 발 열차가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촬영했다. 멀리서부터 기차가 점점 역을 향해 다가온다. 다가올수록 그 검고 거대한 실체를 또렷이 나타내는 기차는 플랫폼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화면 왼쪽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50초짜리 영화였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자기를 향해 돌진하는 기차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고, 그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너무나도 근대적인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에는 기차가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97년 3월27일 인천의 쇠뿔고개에서는 우리나라 교통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제1차 경인철도 기공식이 바로 그것이다.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되면서 인천에는 서양의 근대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철도의 도입은 단순히 근대문물을 넘어, 근대사상의 기저가 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변화를 이끈 문제적인 사건이었다.

이해조의 소설 <월하가인> (1911, 최원식 편집, 홍도화외, 범우, 2004)은 멕시코 농업이민자들의 참상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심진사는 개발회사의 업자들에게 속아 멕시코로 돈벌이를 떠난다. 하지만 떠나기 전의 약속과 현지에서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행히 심진사는 청나라 사람 왕대춘을 만나, 멕시코의 노예노동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성적이 좋아, 주미공사를 만나게 된다. 공사관에서 서기로 근무하다가 공사가 퇴임하여 귀국할 때 심진사도 함께 귀국한다.
'그럭저럭 그 배가 일본에 와 닿아서 일본에서 수일 지체를 하고 또다시 배를 탔더니 어느덧 인천항구에를 도달하였더라, 심진사가 인천서 기차를 타며 곰곰 생각한즉 연전에 자기 떠날 때 근경이 두 눈에 선하고 그 부인이 가지 말라 만류하던 말이 두 귀에 지잉하여 심사를 진정치 못하다가 기적 소리 한 마디에 남대문에 와 정거를 하니.'
위의 대목은 심진사가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기적 소리 한 마디'에 도착할 정도라는 표현에서 가족 상봉을 앞둔 심진사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신문명의 상징인 기차의 빠름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899년 9월13일 인천과 노량진 사이를 임시로 운행하던 경인철도는 이듬해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1900년 11월12일 서대문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함으로써 명실공히 경인선은 완성되어 본격적인 운행에 들어가게 됐다. 인천역은 경인선의 시발지이자 한국철도의 경적을 처음 울린 역사적 장소인 것이다.

인천역은 필자에게도 의미있는 장소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철로설비로 인천역에서 근무하셨다. 그리고 작은 외삼촌은 교통학교에 다니다가 6·25전쟁이 일어나 졸업도 못하고 화물차를 몰아야 했다.
그 당시 열차가 동인천역에서 인천역으로 들어오는 곡선코스에 들어서면 경적을 크게 울려 북성동 관사에 살고 있던 가족들에게 삼촌의 도착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면 가족들은 새로 밥을 지었고, 삼촌은 화물을 내리는 잠깐 동안 집에서 식사를 하고는 바로 기차를 몰고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지금 인천역사는 재개발 논란의 한가운데 있다. 지금의 역사는 1960년 9월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비록 최초의 것은 아니지만, 50년 넘게 인천의 관문을 지켜오고 있다. 허무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