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화도진도(花島鎭圖)>의 화도진.

근대 개항기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책(海禁策)은 끝내 인천 해안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바로 그것으로 이로 인해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 진출을 기도하던 일본에게는 뜻밖의 장애가 되었고 급기야 영종진 포격을 감행하고(1875)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부산을 개항시켰다(1876).

일본의 하나부사 '花房義質'가 개항 교섭을 위해 내항한 1877년 10월부터 조선 조정에서는 인천과 부평 연안의 방비문제를 논의하였다.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해야 한다는 조약 규정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지만, 최소한 인천을 일본의 개항지로 허용하지 않고 또 그들의 압박을 저지하기 위해 방비시설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 해 1878년 8월 인천부의 방위력 강화를 위해 인천과 부평 연안에 진(鎭)과 포대를 설치키로 결의하였다. 인천은 수도에 가까운 해안의 요충으로 보장중지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비용이나 기간에 구애됨 없이 견고하게 진을 쌓아야 한다고 지시하였으며 공사는 추운 겨울철을 제외하고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군부의 최고 실세로 부각되고 있던 무위소(武衛所)에서 방비시설 축조를 주관하였고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가 총감독에 임명되었다. 1879년 7월 두 진의 공사가 완료되어 인천의 신설 진은 화도진으로, 부평의 신설 진은 연희진(連喜鎭)이라고 명명하였다. 두 진의 별장(別將)은 무위소에서 직접 선임하되 포도대장 및 금군별장 또는 훈련도감의 중군(中軍, 종2품 무관직)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명하도록 하였다. 무위소 화도별장에는 이 공사의 감독을 맡았던 김홍신(金弘臣)을 제수하였는데, 임기는 30개월로 두 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독진(獨鎭)으로 만들었다.

화도진(花島鎭)의 완성 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도진도(花島鎭圖)> 에는 묘도(猫島)와 화도(花島) 사이에 석축을 쌓아 잇고 그 뒤 육지 방향에 위치한 화도진 각 진영의 포대시설과 인천도호부 관아(官衙)의 건물배치 및 산천 이름 그리고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연안의 섬 이름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아울러 포대의 명칭과 포좌(砲座)의 방향, 포혈(砲穴)의 숫자 등이 정밀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는 토둔(土屯, 자그마한 언덕)과 응봉산(현 자유공원) 정상의 요망대(군 지휘소)가 표시되어 있어 이 시기 연구의 중요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은 인천개항 불허방침을 고수하려 하였으나 1880년 말 인천개항을 허용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따라서 어렵게 축조한 두 진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82년 6월 연희진 혁파와 화도진의 훈련도감 예속으로 조치되었다. 그나마 이 해 10월 훈련도감마저 혁파되자 화도진은 또 다시 여러 군영에 이속되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 군제 개편시 지방에 진위연대를 설치하게 되자 화도진도 혁파되었다.

1900년 새로운 군제(軍制)로 진위(鎭衛) 6연대제로 편제됨에 따라 인천은 제1연대 제2대대가 되었고, 1902년 월미도(月尾島)에 포대(砲臺)를 축조할 당시 화도진의 일부 건축물을 병영 건축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월미도의 포대가 예포(禮砲)를 쏘는 의전 행사의 부대로 전락함에 따라 인천은 보장중지(保障重地)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