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인천시 중구 북성동의 인천중화기독교회는 오는 6월4일 설립 100주년 기념 예배를 가진다. 1917년 6월3일 인천차이나타운 근처의 작은 집의 방 한 칸에서 데밍(C.S.Deming) 선교사와 화교 몇 명이 예배를 한 것이 이 교회 역사의 시작이다. 인천의 첫 개신교 교회인 내리교회의 설립이 1885년인 것을 생각하면 화교교회는 그 30년 뒤에 설립된 것이다.

데밍은 감리교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부인으로 중국에서 태어나 성장해 화교 선교의 적임자로 조선에 파견됐다. 데밍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12년으로 당시 조선화교의 인구는 1만5000여명으로 선교 본부가 이들에 대한 선교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데밍은 1912년 서울에 한성중화기독교회를 세운 후, 1917년 서울의 관문인 인천에서 화교 선교를 개시했다. 인천은 화교인구가 많고 화교의 경제력이 강해 화교 선교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데밍의 인천화교 선교활동을 초창기부터 옆에서 적극 도와준 인물이 화교 손래장(孫來章)이었다. 그는 산동성 출신으로 신앙심이 두터워 데밍 선교사의 큰 신뢰를 받았으며 선교회의 지원으로 중국 남경 금릉신학을 졸업했다. 그는 윤치호 고희기념식에 참석하여 장수를 축원하는 축사를 할 정도로 조선인 기독교 지도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의 화교 선교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인천화교는 중국 전통의 도교, 유교, 불교 및 민간신앙의 영향을 받아 이주 초기 관우, 용왕, 마조, 호삼태야, 관음보살 등을 모신 의선당을 건립했다. 인천화교는 이 공간을 통해 고향에서 향유하던 종교 및 문화생활을 영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여기에다 화교는 조선에 정착할 목적으로 이주하기보다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단기 체류형 이주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교회의 성장은 좀체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래장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양복점을 경영하는 화교 신도 응귀발(應貴發)의 지원으로 1920년대 교세는 확장됐다. 집을 빌려 예배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1922년에는 1층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아쉽게도 2002년 헐리고 현재의 건물로 바뀌었다.

인천교회는 1930년대 1931년의 화교배척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인한 교인의 감소와 교인 경제력의 약화, 중일전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중일전쟁 시기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친일 행위 강요로 조선의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지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방 후 인천, 서울, 부산의 3개 중화기독교회는 큰 혼란에 직면했다. 중일전쟁 기간 목사가 본국으로 귀국하고 교인이 감소했다. 여기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교인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교회는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을 비롯한 3개 교회의 재건을 위해 교파를 초월하여 1954년 중화기독교재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중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했거나 목회활동을 했던 한국인 목사가 각 교회를 돌면서 전도활동을 했다. 중화기독교회가 점차 안정을 되찾으면서 1960년 중화기독교한국노회가 설립, 인천을 비롯한 각 교회의 지도권은 한국인으로부터 중국인에게 이양됐다. 노회는 1962년 대만에서 5명의 중국인 목회자를 초빙, 인천을 비롯한 각 교회에 배치했다.

인천중화기독교회는 1960년대와 70년대 신도수가 100여명을 훨씬 넘을 정도로 교세가 확장됐고 주일학교 학생도 급증했다. 인천화교의 자연증가와 1957년 인천화교중학 설립으로 중고등학생이 외국과 타 지역으로 유출되지 않은 점, 휴전 이후 화교경제가 점차적으로 안정된 것이 그 배경이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화교에 대한 각종 차별정책으로 1970년대 이후 미국, 대만, 일본 등지로 재이주하는 화교가 늘어났다. 교회의 신도 수는 1980년대 들어 감소하기 시작, 현재는 50여명에 불과하다. 화교는 이 가운데 절반에 불과하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인이다. 2009년 인천교회에 부임한 강대위 목사는 교세의 약화와 교회 신도 구성 변화에 발맞춰 한국어 설교의 예배 시간을 신설했다. 일요일 오전 예배는 중국어, 오후 예배는 한국어 설교로 바꾼 것이다. 예배 방식은 한국의 교회와 거의 같다.

인천화교에게 교회는 자신의 집보다 귀한 곳이다. 이국의 땅에서 받는 여러 설움을 달랠 수 있는 안식처이자 화교 신도 상호간 교제를 통해 화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교 인구의 감소, 신화교의 증가, 한국인 신자의 증가와 같이 교회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이 교회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화교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적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중대한 기로에 직면해 있다. 인천중화기독교회의 지난 100년의 뜻깊은 역사를 축하하며 앞으로 지역과 함께 더 큰 발전을 이루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