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백마처럼 하얀 양복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온 방을 한바탕 휩쓸
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풀려 나왔다. 엄마가 손목에다 친친
감곤 하던

발정 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
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처음 터지던
곳간

가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
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
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화평동 집


세상 속에서의 삶이 가혹하더라도 돌아가서 언제나 손발을 녹이고 등을 따뜻하게 뉘일 수 있는 곳이 집이다. 집이란 가족들의 냄새가 비릿하고 끈끈하게 배어서 그 따뜻함들이 다시 힘과 위안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서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곳이어야만 된다. 그러나 시의 화자에게 집이란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곳이고, "끊어진 검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곳이다. "백마처럼 하얀 양복을 입고(…)/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풀려"있어서 "발정 난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리던 집에선 아버지는 언제 바람이었고 태풍처럼 소용돌이를 몰아오는 존재였다. 또한 화자는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보면서 그곳이 생명의 시원이자 원천임을 확인하고 싶지만 결코 그곳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다. "가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과 함께 밤새 울음을 울어야 했던 집. 그 옛날의 화평동 집도, 아버지도, 슬픈 어머니에게도 이제는 따뜻하게 햇살이 비치고 온기가 돌았으면 좋겠다. /주병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