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수 남구청 문화예술과 학예사
▲ 이홍장, 중국의 부왕 /자료=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최근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중국어선의 서해안 불법조업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바다의 경제·군사적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동아시아 해양은 국제적인 분쟁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서해 연안 및 도서 어민들의 피해가 극심하다. 오죽했으면 연평도 어민들이 직접 중국어선을 나포하는 위험을 감수했을까 싶다. 이러한 갈등의 연원은 상당히 오래됐다. 130여년전 개항기 서해 바다에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똑같이 연출되고 있었다.

조선후기 조선 연해에는 황당선(荒唐船)이라 불리는 중국의 선박이 대거 출몰해 조선의 해상방위뿐만 아니라 연해 지역민들의 경제생활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더욱이 해상에서 어업·무역활동을 하다가 악천후를 만난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육지와 해상에서 은밀히 전개되는 밀무역도 성행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 왕조의 전통적 해금(海禁) 정책은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있었고, 근대적 통상조약 관계로 전환되며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 군대의 포격에 대해 도리어 중국의 실권자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항의했다. 이에 이홍장은 근대 국제법 번역서인 <만국공법>을 준용하여 "너희 군함이 조선의 바다로 간 것이다. 만국공법을 보면 연해 10리의 땅은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한다. 일본이 아직 조선과 통상하지 않았는데, 불응하고 들어가 측량하니 조선이 대포를 발사한 것이다"며 대응했다. 만국공법에 나와 있는 대체로 대포의 포탄이 미치는 10리 정도의 거리가 국권이 미치는 영해(領海)라는 국제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비로소 동아시아에 해양경계에 대한 개념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항 직후 조선 연해에서 중국어선의 불법적인 어업활동은 더욱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다. 중국어선 수십 척이 무리를 이루어 큰 배는 어로를 막고 큰 그물을 설치해놓고, 작은 배들은 섬 주위를 돌면서 그물을 던져 마구잡이로 고기를 건져냈다. 조선 어민이 오면 포를 발사해 접근을 막았다. 다른 경우, 큰 배는 잡은 고기를 구매하는 상선으로 작은 어선들이 고기를 잡으면 바로 상선에 판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큰 배는 적재량을 다 채우면 중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큰 배가 그 역할을 대신하며, 작은 어선들은 계속해서 고기를 잡는 사례들이 나타났다.

더욱이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며, "상대국 개항장에 각기 상무관을 주둔시킨다, 조선에서 청국이 치외법권을 갖는다, 중국 상선의 조선 개항장 출입이나 호혜적인 근해 어업을 허용한다" 등의 중국의 일방적인 특권이 명문화됐다. 이것이 개항 이후 외국에 부여된 조선 연안에 대한 최초의 어업권이다. 설상가상 그 과정에서 이홍장은 서양 윤선(輪船)의 소음 때문에 중국 산동의 물고기가 놀라 조선의 서해안으로 옮겨갔다는 기묘한 논리를 펼치며 중국어선의 침탈을 합리화시켰다.

이렇듯 조약, 선진 기술과 폭력을 동반한 중국어선들의 침탈로 인해 연해 및 도서민의 피해는 극심해졌고, 도처에서 지역민의 반발이 나타났다. 1884년 1월 소청도에서 중국어선 2척이 60~70명의 지방민에게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3월 홍주 외연도에서도 지방민 150명이 중국어선을 습격하여 약탈했던 일, 4월 백령도 주민들의 중국인 살상 사건 등이 일어났다. 또 남해안에서도 일본 어민과 조선 어민의 충돌은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갈등은 심화되어 이들 사이에는 투석전이 벌어지거나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비화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결국 조선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백성들이 외국의 어업침탈에 대해 스스로 나아가 대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