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경제연구소장
엄청나게 많은 말들이 허공에 난무하고 있다. 선거철마다 겪는 이런 현상 속에서 이제 나의 이성과 감성은 감각을 잃어간다. 그 말들이 지역이고 나라의 이익을 남다르게 걱정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패거리들의 논리에 충성하고, 분위기의 쏠림에 무방비한 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조작된 것들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평생 꽤 많은 선거를 치렀지만 그 학습의 결과로 남은 것이 이렇다. 그러나 나의 이런 경험이 아무리 일반적이라고 해도, 대의제를 기본 정치구조로 하는 민주주의가 선거를 피해가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형식이 세계적으로도 이미 많은 부조리를 낳고 있는 것이어서 미래에는 많은 새로운 방식들이 나타날 것이고 새롭게 바뀌어야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범인류적으로 별 뾰족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또한 사실을 따져보자면 이 제도가 그렇게 용서받지 못할 원죄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선거를 통해서 권력의 사유화를 막을 수도 있고, 선거를 매개로 대중적인 토론을 유도해 좀 더 나은 사회적 대안을 공개적으로 모색하고 조정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마당이 선거라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현실이 항상 이러한 이상적인 논리를 배반한다는 데에 있다.
선거의 이상과 현장이 노상 괴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적임자를 자처하고 나서는 인물들이 지나치게 볼품이 없다거나, 패거리 정치의 불합리성이 논쟁의 합리성과 과학화를 방해한다든지, 유권자들의 정책에 대한 인식 수준이 지나치게 빈곤하고 그들의 선택이 지역이나 인연 따위 엉뚱한 논리 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런 조건 속에서 이상이 실현될 가능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논의를 전제로 할 때, 우리의 선거 현장이 이상에 가깝게 치러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현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상식이 용납하지 않는 허언과 궤변,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 눈속임과 선동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의 이 제도에 대한 신뢰는 그저 허탈할 뿐이다.

선거에 있어 가장 중심에 서는 언어가 공약과 구호라는 것이다. 배후의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모든 공방이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언어들을 오래전부터 별로 믿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다양성과 가변성이 폭증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자리에 가보기도 전에 유효한 바른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있다고 믿지도 않거니와, 제대로 지켜진 선거공약의 현실적인 사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늘 그 사람의 인품과 그 자리에 합당한 능력,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 정도에 그친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 선거는 나를 이렇게 태평하게만 놓아주지를 않는다. 분명하게 이 나라의 운명을 가를 가치관의 결정이 강요되고 있는 숨 막히는 현실의 압박 때문이다. 내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이 나라의 안보에 대한 견해와, 이 사회 전반에 팽배한 불합리와 부조리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과제를 두고 양극으로 대립하고 있는 현실이 그들의 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내일은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결정과 상호 불공대천의 지경으로 갈라진 사회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우리의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길러낼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제 답을 미룰 여유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고,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해법을 듣고 싶어 애가 탄다.

그러나 거리에 붙어있는 벽보와 플래카드, 각종 매체에 전개되는 보도와 토론을 지켜보다보면 여전히 예의 허탈함 속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절박한 상황에 대한 똑 부러진 대답과 논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고 신물 나게 보고 들은 진영의 논리와 상대의 약점 잡기가 여전히 재연된다. 국익에 대한 객관적인 고민보다는 오직 말 한마디에 오고가는 표의 계산만이 분주하다.

자신들도 그 의미를 알까 싶지 않은 4차 산업혁명 따위 뜬구름 잡기 아니면 재정 퍼주기로 노골적인 표의 매수에 골몰한다. 실현가능성은 고사하고 그대로 실현되어서는 나라가 결딴이 날 것이 불 보듯 한 내용들이 넘쳐난다. 거리에 걸려 있는 현수막의 구호들마다 거의가 비문(非文)이거니와 "국민이 이긴다"라는 구호에 이르고 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국민이 무엇을 이긴다는 것인지…, 이기는 국민만 국민이라는 것인지…. 어떻게 수준이 이럴 수가 있는가.

전직 대통령을 무능하고 썩었다고 끌어내려 놓고, 국내외의 안보·경제적 위기상황에서 치르는 선거라면 그에 상응한 깊이와 무게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또 다시 5년을 가슴 치며 살고 싶지는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