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데자뷰(dejavu)
▲ 1880년대 조선의 처지를 표현한 풍자화(프랑스 인 시사만화가 조르주 페르디낭 비고가 그린 '낚시놀이'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1 ( 2013)
130여 년 전 제물포는 중국·일본은 물론 서구인들의 각축의 현장이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제기된 인천 개항문제가 지지부진하던 차에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은 이른바 신식군대(별기군)에 비해 차별을 받았던 구식군대(훈련도감) 병사들의 불만이 분출된 것으로 1882년 6월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사건을 시작으로 유력 대신들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포위했던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부사(花房義質) 등 일본인들은 인천을 도주처로 관교동과 숭의동·도원동을 거쳐 월미도 해안에 이르러 영국배 플라잉 피시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난이 발생하자 청·일 양국은 조선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병력을 동원했다. 특히 청나라는 대군을 출동시켜 적극 간섭에 나서 임오군란의 배후세력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함으로써 흥선대원군 일파의 재집권 여망은 33일 만에 붕괴됐다. 일본은 피해보상과 거류민 보호를 내세워 하나부사를 다시 조선에 파견해 군란의 책임을 묻고 사후처리의 협상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 마건충의 중재로 조선측 전권대신 이유원과 부관 김홍집이 하나부사와 1882년 7월17일(양력 8월30일) 인천에서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일본의 야심이 그대로 반영된 불평등조약으로 6개조의 본 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으로 구성됐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군란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고 박영효·김옥균등을 일본에 보내 사과의 뜻을 표했다.

특히 1876년에 맺은 조·일수호조규를 보완한다는 명목으로 수호조규속약 체결을 요구했는데, 이를 통해 일본은 인천·부산·원산 각항을 기점으로 100리까지 개항장을 확장했고 일본 관원들의 조선 내지 통행권을 획득했으며 용산까지 자신들의 시장으로 확보했다. 수호조규 체결 이래의 숙원이었던 외교관과 영사관의 조선 내지 여행권과 내륙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은 제물포조약으로 일단락됐지만 인천은 그로부터 4개월 후에 개항이라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였고, 정치계는 청·일의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친청·친일이라는 입장을 달리하는 반목이 생겨 또 한번의 정치적 변란인 갑신정변(1884)을 초래하게 됐다.
제물포는 개항 초기 한적한 어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조선 초기 이래 수군 진지 제물량영이 있어 해안 방어뿐 아니라 조운선을 호송하는 중요한 임무도 수행했던 곳이다.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 일대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삼남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다. 개항장에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당시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약 체결의 지점은 일본 군대 임시 군영이 있었던 일본제1은행 자리 즉, 지금의 개항박물관 일대다.
당시 일본인 희생자는 지금의 답동일대에 매장됐는데, 일본인들은 훗날 갑신정변의 희생자 일부도 여기에 매장하고 탁계(坼溪) 육군묘지라 불렀다. 답동 일대는 1889년 무렵 일본인 공동묘지로 선정돼 해마다 일본 거류민의 분묘가 늘어나고 각 종파의 절이 세워졌다.

1908년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시가지가 조성되자 공동묘지는 율목동으로 옮겨갔고 육군묘지도 같은 곳으로 이장됐다. 또,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사들을 따라 들어왔던 광동상인들이 초기 청국조계지에 정착하면서 이후 산동상인들이 점차 증가했고 지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는 근간이 됐다. 2017년,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130여 년 전 근대의 변곡점에 있었던 개항장 인천을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