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옥 경제부장
▲ 윤관옥 경제부장
앞으로 29일 후면 대한민국을 이끌 새로운 리더 제 19대 대통령이 국민 손으로 선출된다. 정치적 풍랑 끝에 다가온, 예기치 못한 '조기 대선'이자 도식적인 '여야 양강구도' 지형이 파괴된 선거라는 점이 이번 대선의 특질이다. 상당수 유권자가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 한 표를 행사하는 게 나을까' 목하 고민하는 눈치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두고 세간에선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내부 쟁투만 벌이다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구한말 시기가 재연된 것 같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그러면서 새삼 조선 후기 소장파 학자들에 의해 꿈틀 대던 실학사상의 강렬한 움직임이 머릿 속에 물결처럼 오버랩된다.

인천 제물포고 출신으로 국내 양명학의 거두로 통하는 정인재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조선사회를 떠받치던 전통적 유교 사상의 주류는 이학(理學)을 근본으로 삼는 주자학이었다. 이 때문에 같은 중국에서 건너왔지만 심학(心學)을 근본으로 삼던 양명학은 비판과 탄압의 대상이자 불순한 학문으로 취급됐다.

주자학이 '먼저 알고 실천함'(先知行後)을 강조한 데 비해 양명학은 '앎과 실천이 동시에 일어난다'(知行合一)고 본다. 이치와 도덕을 추구하되 실용적 사고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실학과도 공통분모가 많았다. 하지만 당대 소수파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양명학은 음지에서 모진 겨울을 나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한국 양명학은 '강화학파'(江華學派) 또는 '하곡학파'(霞谷學派)로 재탄생하게 됐다.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운 조선후기 학자가 바로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년)다. 하곡은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정국의 혼란을 통탄해 30여 차례의 천거도 뿌리친 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09년 강화도 하곡으로 이주해 살면서 조선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그의 학맥을 하곡학파 또는 강화학파로 부른다. 이황이나 이이의 성리설을 비판하기도 했다.

강화학파의 맥을 이은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에겐 엄격하고 백성들은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며 실천하길 주저하지 않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다. 저촌 심육(1685~1753년)은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경향각지, 심지어 중국까지 다녀오며 견문을 넓혀 후일 47권 18책으로 이뤄진 '저촌유고'(樗村遺稿)를 남겼다. 항재 이광신(1700∼1744년)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격물'(格物)에 대한 인식 차이를 비판하며 양자의 절충 노력을 기울였고, 하곡의 제자 원교 이광사(1705~1777년)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해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월암 이광려(1720~1783년)는 비록 성공에 이르진 못했으나 고구마 종자를 시험재배하는 등 백성들 삶에 참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현동 정동유(1744~1808년)는 제주도에 표류한 외국인들의 언어와 문자를 한글과 한문으로 표기해 통역이 이뤄지도록 했는가 하면 당시로선 금기시 됐던 박지원·김만중의 지동설을 지지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영재 이건창(1852~1898년)은 조선을 통틀어 과거시험에 급제한 최연소 주인공이었다. 당시 나이 15살. 암행어사로서 부패 관리들을 처단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았는데 할아버지 이시원(1790~1866년)은 병인양요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동생 이지원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했다. 경재 이건승(1858~1924년)은 이건창의 동생이자 난곡 이건방(1861~1939년)의 재종형인데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홍승헌·정원하와 함께 자결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후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인 위당 정인보(1893~1950년)는 주체적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을 주도했다.

강화군과 한국양명학회가 지난해까지 13회째 '강화 양명학'이란 주제로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하곡 강화학파의 중요성을 인식한 시흥시가 지난해 '시흥의 재발견-한국 양명학의 고향은 시흥'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양명학 학술대회를 열었다. 시흥문화원은 어르신 문화활동가 양성 프로그램으로 '양명학 강좌'도 개설했다. 하곡이 41~60살 20년 간 시흥에 살면서 양명학의 씨앗을 뿌린 곳이 시흥이라는 점에 착안한 지역 얼 찾기 움직임이다.

한국 양명학의 본산이 강화냐 시흥이냐를 논쟁에 부치고 싶은 의도는 없다. 서로 인연이 있다면 그것대로 인정하고 공유하면서 상생의 길을 찾으면 그 뿐이다. 다만 아쉬움은 고유의 가치를 알아보고 잘 계승 발전시켜 나가느냐 여부일 것이다. 시흥의 적극성에 비해 인천의 무관심 쪽에 가까운 역사인식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