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초보'로 야구인생 '3막' 한발 물러나니 판이 한눈에

98년 우승 때 광경 평생 못 잊어

SK 2군 감독 '재계약 불가' 통보

섭섭했지만 우물 밖으로 나온 듯



선수들 성적보다 '마음' 읽어야 …

아버지 '김진영'은 넘고 싶은 산

해설로 내실다져 미래 준비할 것




1994년 10월12일 대전구장.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태평양 돌핀스와 한화 이글스는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에 돌입했다. 10회초 2사 후 '00'번을 등에 새긴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해 아쉽게 홈런왕을 놓친 4번타자 김경기. 상대 편 에이스 정민철이 던진 공은 담장 밖으로 훌쩍 넘어갔다. 인천 연고 팀을 사상 처음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은 홈런이었다.

4년 뒤인 1998년 10월30일 인천구장.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스는 LG 트윈스를 5대 2로 이겼다. 인천 팀이 17년 한을 풀고 첫 우승을 차지한 순간. 현대 주장 김경기는 팬들을 향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지난 4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만난 김경기(50) SPOTV 해설위원은 "1994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3차전이 '인생 경기'였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98년 우승 때다.

관중석을 바라보니 '연안부두' 노래를 부르며 다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40여년 만에 유니폼 벗은 '미스터 인천'

'미스터 인천' 김경기가 야구 인생 40여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어색한 넥타이를 매고 지난 1일 SK 와이번스와 kt 위즈의 개막 3연전이 열린 인천 SK행복드림구장을 찾았다. 해설위원 데뷔전이었다. "현장에서 가까이 경기를 지켜보다가 한발 물러나니까 상대 투수, 수비, 주루까지 한눈에 들어와요. 야구 인생에 득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김 위원은 올해부터 케이블 채널 SPOTV에서 해설을 시작한다. 해설위원직을 제안받은 건 SK 2군 감독에서 물러난 지난해 말이었다. "10개 구단 야구를 들여다보려면 해설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방송사와 연결돼서 흔쾌히 승낙했어요."

해설위원이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지난해 그는 SK 2군 감독으로 첫 감독 생활을 했다. 젊은 선수들이 1군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도 느꼈다. 지난해 10월 말 갑작스럽게 '재계약 불가' 통보가 전해졌다. 기사에는 '인천 야구의 상징을 버렸다'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김 위원도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숨을 고르고 보니 한 곳에만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물 밖으로 나가 알찬 시간을 보내면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봤죠."

이미 2차례 다녀온 해외 연수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국내 야구를 분석하며 내실을 다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설위원보다 나은 자리는 없었다. 연말부터 정보를 모으고, 선수들과 대화를 나눴다.

"먼저 다가가면 거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성적말고도 선수들이 어떤 마음으로 운동하는지도 알아야 하니까요." 서먹했던 분위기는 금세 허물어졌다. 운동장 안팎에서 선수들을 만나는 일은 일상이 됐다.


▲'인천 자존심 김경기, 고향의 품으로'

인천 야구팬과의 이별은 처음이 아니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현대는 수원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서울행'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정든 팀을 떠나보낸 팬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 떠난 팀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인천의 4번타자'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해 수원 야구장에는 '인천 자존심 김경기, 고향의 품으로'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김 위원은 연고지를 옮긴 현대에서 1경기도 뛰지 않았다. 부상은 표면적 이유였다. 시범경기가 열린 3월 어느 날 스포츠 신문 1면에는 'SK가 김경기와 박진만을 원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기가 끝나고 저와 진만이만 내야 수비 훈련을 했어요. 두 사람 경기력이 나쁘지 않았는데 기합에 가까울 정도로 공을 받았죠. 몸을 날리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어요."

그날 이후 1군에 오르지 못했다. 1루수 자리에 구멍이 났지만 아무런 호출이 없었다. "경기에 내보내지 않을 거면 '인천으로 보내 달라'는 항명 아닌 항명을 했죠." 2000년 7월 현대는 이적료 2억원을 받고 그를 SK로 보냈다. 이듬해 그는 은퇴를 선언한다. 서른 셋의 나이였다.

"SK로 옮기고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어요. 1999년부터는 하향곡선을 그렸죠. 차라리 지도자로 새로운 길을 여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김 위원은 도원동 인천구장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인천 야구팬과 '미스터 인천'의 두 번째 이별이다. SK는 2002년부터 문학구장으로 둥지를 옮겼다. 2001년 가을 도원동에서의 마지막 경기. 그에게도 선수 생활의 마지막 경기였다.

"승부가 넘어갔는데 대타로도 타석에 서지 못했어요. 추억이 담긴 도원구장과 같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더그아웃에서 끝나고 말았죠." 그날 경기는 야구 인생에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 뒤를 따르려는 '초보 해설가'

야구 인생 내내 김 위원에 관한 글에는 함께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인천 야구의 대부' 김진영(82). 1950~1960년대 '국내 최고 유격수'였던 그는 국가대표와 삼미 슈퍼스타즈, 인하대 등에서 감독을 지냈다.

김 위원에게 아버지는 "친구이자 가장 싸움을 많이 하는 존재"다. "같은 시합을 보고도 다른 분석을 하니까 다툼이 잦았어요. 지금 미국에 계셔서 자주 뵙지 못하지만 야구 인생에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았죠."

2002년 1월 한 스포츠 신문과의 은퇴 인터뷰에서 김 위원은 '아버지 뒤를 따르고 싶다'고 했다. 현장으로 돌아가 감독을 하고 싶은 꿈도 여전하다. 현역 시절 리더십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 위원은 '미래 감독감'으로 자주 꼽혔다. 코치 시절에는 'SK 왕조' 주축 선수들을 길러내며 지도력도 인정받았다.

"감독이 되지 못한 건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겠죠. 해설하며 공부하는 지금이 앞날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때가 와도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니까요."

김 위원은 이제 '해설 초보'로 야구 인생 3막을 열었다. 그는 올시즌 5강을 놓고 두산·LG·기아·NG·넥센·롯데가 경쟁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 SK를 빠뜨렸네요.(웃음) SK 선수들은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이 있어서 좋은 성적을 낼 겁니다."

1990년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안타를 친 프로 첫 타석부터 2001년 현대를 상대로 홈런을 쏘아올린 마지막 타석까지. 나아가 고교 최고 타자로 이름을 알린 인천고 시절부터 'SK 왕조' 지도자 때까지 무한한 지지를 보낸 팬들을 그는 잊지 않는다.

"제 실력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만큼 스스로를 키워서 인천 팬들에게 보답해야죠." 인터뷰를 마친 김 위원은 "선수들을 만나야 한다"며 서둘러 그라운드로 향했다. 오후 4시, 경기 시작까진 3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김경기 프로필

학력: 한양초·상인천중·인천고·고려대
선수 생활: 태평양 돌핀스(1990~1995)·현대 유니콘스(1996~2000)·SK 와이번스(2000~2001)
지도자 생활: SK 와이번스 타격·주루 코치(2002~2014), 수석 코치(2015), 2군 감독(2016)
경력·수상: 1985년 이영민 타격상, 1988년 서울올림픽 국가대표, 1994년 홈런 2위, 1996년 1루수 골든글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