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라디오 방송을 거의 듣지 않는다. 안 듣는 것도 아니고 못 듣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리 됐다. 주로 밤늦은 시간 혼자 라디오를 틀어놓고, 어둠에 스미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고는 했는데, 혼자가 아니게 되면서 라디오는 자연히 멀어지게 됐던 것 같다.
어쩌다 버스를 타게 되면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남녀 사회자가 주거니 받거니 얘기도 하고, 사연도 들려주는데 어떤 경우엔 저절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해 난감한 경우도 있었고, 코끝이 찡해져 내릴 정류장을 놓친 경우도 있었다. 퀴즈 문제에는 탐나는 상품을 걸어놓고 청취자가 정답을 맞히게 했다. 위의 시 역시 그런 정황이다. 그런데 문제를 낼 때 일반적 예시로 사용하던 '보기'와 라디오 특성 상 '듣기'의 차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문제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보는 프로가 아니니 문제를 낼 때도 '보기'가 아니라 '듣기'여야 하는 걸 미처 모른 것이다. 라디오에서 문제를 내는 사람도, 그걸 듣는 사람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시를 읽고 나서야 아하, 하게 됐다.
우리 삶에서 여러 감각 중 대체로 시각이 우선한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은 '보이는 라디오'라고 라디오 방송하는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유리 부스에서 진행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너무 눈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소리에만 집중해 라디오를 듣던 그 시절, 사연을 들으며 이러저러 공상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던 내가 있었다. 요즘엔 도무지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갖기 어렵다. 그나저나 '눈이 보배'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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