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 그렇게 '발가벗은' 반성
▲ 60세를 맞은 현재. 20년 전과 변함없는 모습이다.
▲ 활짝 웃고 있는 40대 초반 때의 김영승 시인.

1987년 센세이션 일으킨 첫 시집

언론 '극찬' 문공부선 '외설' 경고

거창한 뜻 없다 … 그저 명랑할 뿐

수만편 시에 '인천 속 내 삶' 담겨




70년대 유행한 장발머리에 '어린왕자' 같은 해맑은 웃음. 시인 김영승(60)의 풍모는 변함이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말이다.

"누군가 영화 '고래사냥' 시절에 나왔던 헤어스타일이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면 이제 깎을 때가 됐구나 하고 동네이발소로 갑니다. 그러면 대충 알아서 깎아주지요."

87년 시집 <반성>을 펴내면서 국내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김영승. 오는 30일이면 꼭 발간 30주년을 맞는 <반성>의 시인 김영승을 봄날 늦은 오후 동춘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알려줘서 30주년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승은 30일 오후 6시30분 수봉공원 인천문화회관에서 <반성> '시낭송의 밤'을 갖는다. 87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 시집을 냈는데 언론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공부로부터 외설 경고를 받은 겁니다. 당시 한국현대시 80년 사상 최초의 사건이었지요. 우리나라 주요 언론은 물론이고 AP통신까지 제 기사를 다루었어요."

문제는 연작시인 '반성 563'의 내용에 있었다. 불타(부처님), 예수, 아버지, 대통령 등의 단어가 들어간 시였다. 김영승은 이 시에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단어를 썼다. 당시만 해도 책을 판매하려면 정부의 '납본필증'이 있어야 하는 군사독재시대. 문공부는 대통령과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단어를 함께 썼다며 외설 판정을 내린다.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가 신문에 제 변론을 썼고, 시인 최승호도 나를 옹호했어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이자 시인이던 고 기형도,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이던 소설가 김훈 등이 나를 인터뷰 하느라 고생했지요."

 김영승은 이후 '천재시인' 혹은 '전설적 시인'으로 불려왔다. 무수한 시인, 평론가들이 김영승을 '전설의 인물'로 만든 것이다. 피식. 김영승은 그런 세상의 평가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면 정작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1302편의 연작시 '반성'은 그 자체로 시인의 '지금 여기'(now and here), 그 '삶의 자리'(Sitz in Leben)에서의 문학입니다. 그 구체적 육화의 소산이지요. 고도의 비유문학이고 시인의 감각체계-사유체계-언어체계가 일치된 극의 에피파니 그 극미의 '그림언어'인 것입니다."

연작시 반성은 정치적 메타포나 거창한 메시지가 아닌, 그저 몸에서 체화한 '개인'의 문제를 토해낸 것이란 얘기다. 이후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시를 쓰고 자신을 유지해 왔다고 고백한다.

"피카소는 자신이 어린 아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했지요. 나는 30년 이상을 '긴 머리 소녀'란 노래를 불러왔는데 가사의 눈먼 아이처럼, 귀먼 아이처럼 그렇게 조심조심 징검다리를 건너온 것 같아요. 즐겁게 명랑하게 잘 건너 왔지요."

시인은 "조금만 더 건너가면 된다. 10대부터 내가 간직해온 데카르트의 '잘 숨은 것이 잘 산 것이다'란 좌우명처럼 나는 잘 살았던 것이다"라고 웃음지었다.

 인천에서 낳고 자란 시인에게 고향 인천은 어떤 공간이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인천의 시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천의 신문인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하는 겁니다. 인천은 내게 있어서 신약성서 15번에 나오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온세상)에 해당하는 그 삶의 자리입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는 끊임없는 자기추방의 유배지이기도 하지요. 수평의 시지포스의 도로(아무 보람이 없는 수고)이며 동시에 수직의 링반데룽(길을 잃어 제자리를 맴도는 일)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인천에서의 성장과 나의 삶은 내 그 수만 편의 시에서 나타납니다."

시인 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부평문화원과 연수문화원에서 '김영승의 시창작교실'을 열어오고 있다. 시집 <반성> 발간 30주년 기념 시낭송회도 제자들이 만든 사이트인 '인성헌'(대표 이정미 문학평론가)과 제물포고등학교 21회 동기 중심의 '영사모'(시인 김영승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 심상렬 광운대 교수)가 준비한 것이다.

김영승은 30년 간 미뤄왔던 시집 <희망>과 <재미있는 이야기>, 산문, 시론집 등 20여 권의 책 출간을 계획 중이다. 장편소설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반성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반성 이전의 삶, 하이데거가 말하는 자기성찰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무반성인, 즉 일상인이야말로 대자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으로 변전되기를 모든 인류에 부탁합니다."

카페라테 잔을 잡는 시인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시집 『반성』 자서

몰수당한 젊음, 아득히 까마득히 유예된 꿈, 육시당한 젊은 육신 …
그렇게밖에 요약될 수 없는, 한 도덕적 천재의 그 어처구니 없이 참혹한 젊은 시절.
나는 회복하고 싶다.
어두운 나의 도처에 폭죽처럼 펑펑 터지는 그의 얼굴, 예광탄처럼 스치는 그의 얼굴,
아아, 은하수처럼 펑펑 쏟아지는 그의 그 고운 눈빛 … 부서지듯 웃던 내 눈부 신 그 웃음도.
잘해 보자.

1987. 3. 김영승






김영승 시인은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나 축현초등학교, 동산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온 뒤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시 '거리'가 <현대시학>에 실렸으며 고2때 김악당이란 필명으로 <현대시학> 9월호에 시 '봄'을 발표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87년 계간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반성·序'를 발표하며 본격 문단에 데뷔한다. 이듬해 시집 <반성>(민음사)을 펴냈으나 문공부로부터 '외설' 경고를 받는다.

영자신문인 '코리아헤럴드'에 영문으로 난 기사를 접한 AP통신 한국지사장 베리 렌프류(Barry Renfrew)의 전화를 받고 프레스 센터 19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진다.

이후 작품을 쏟아내며 문음사, 백남문화사 등 몇몇 출판사 주간 및 문예지 등등 편집위원, 주간 등을 거쳐 시창작을 가르쳐오고 있다. 현재 미추홀창작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2008년 한국현대시 100주년 기념 조선일보 선정, 지난 100 동안 작고 시인 포함 100명의 시인과 한국현대시 100주년 기념 동아일보 선정, 지난 100년 동안 작고 시인 포함 50명의 시인에 선정됐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