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분열의 시대…모두가 뭉쳐야 산다"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Join, or Die)'. 하석용 공존사회를 모색하는 지식인연대회의 대표는 "미국 건국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지금 우리 사회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하나가 되고 단단하게 뭉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천을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인 하석용 대표는 분열의 시대, 사회통합을 외친다.

▲인천시민운동 1세대
하석용 대표는 1994년 봄 청량산살리기시민모임을 시작으로 그해 연말 인천환경운동 결성을 주도한다. 인천환경운동연합은 굴업도 핵 폐기장 건설 저지, 영흥화력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 등 인천의 대형 환경 분쟁에서 시민저항운동의 중심이 됐다. 지역에서 하 대표를 시민운동의 1세대로 꼽는 이유다.

하 대표가 '조직화된 시민운동'에 관심을 쏟은 이유는 무얼까? 하 대표는 "1993년 1년간의 영국유학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국세청에서 세무공무원을 하던 그는 나이 40이 넘어서는 인생의 항로를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절로 들어간다.

국세청에서 20년만 근무해도 자동으로 주어지는 세무사 자격증을 거부하고 근무 11년만에 선망의 직장을 내던지고 세무사 자격증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1년만에 세무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세무사 사무실을 차린 뒤 세무소송에서 승소 2000만원 가량의 수임료를 받게 된다. 대기업 연봉 2배에 달하던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바로 영국유학에 나선다.

하 대표는 "학위를 따겠다는 유학이 아니었던 만큼 영국 곳곳을 돌아본 뒤 유럽 꼭대기 아이슬란드에서 유럽 맨 밑 이탈리아까지 훑었다"면서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조직화된 시민운동, 특히 대안까지 제시하는 환경운동에 관심이 쏠렸다. 아~ 내가 살아갈 길이 바로 이것이구나라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귀국하자마자 청량산 모임과 환경운동연합 결성에 나선 이유다.

사실 그는 세무공무원 시절에도 지역문화운동에 뛰어 든 전력이 있었다. 인천중·제물포고 동창들을 설득, 1700만원의 거금을 모아 연극단을 창설한 것. 1980년대 후반 서울에 가려진 인천의 문화를 부흥시키자는 설득에 동창들이 동참한 것이나 엄청난 성금을 모인 것도 지역에서는 사건으로 받아 들였다. 그것도 연극이라니.

하 대표는 "전무송 등 기라성 같은 배우와 스탭 100여명이 모였고 6개월간의 연습끝에 '리어왕'을 당시 인천시민회관에 올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척박했던 인천문화계를 살리겠다는 그의 실험은 그렇게 끝났지만 당시 만들었던 극단은 여전히 인천에서 활동중이다.

영흥화력발전소 저지운동 과정에서 채택한 국내 최초의 '환경협약', 동양화학 폐석회 처리 과정에서의 시민대표 포함한 4자 합의도 하 대표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언론인? 시민운동? 인천인!
최기선 인천시장 시절 그는 인천시 결산감사위원으로 3년간 활동했다. 결산감사위원은 1년간 인천시가 벌인 행정행위를 살펴 보는 자리인데 대부분 형식적으로 운영됐다.

숫자에 밝았던 하 대표는 요식행위를 받아 들이지 않고 예산서와 결산서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공무원들에게 점차 '저승사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송도매립지 방파제 사건. 국내 대기업이 송도신도시 매립을 위해 7㎞ 가량 방파제를 쌓았는데 엉터리 공사가 됐던 것. 월드컵축구장을 만드는 명분 하에 문학산에서 채취한 석재를 아무렇게나 쌓아 둬 송도신도시 전체가 물바다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 대표는 인천대 토목전문 교수와 이를 파헤쳤고 결국 건설사가 방파제를 제대로 마감하는 것으로 손을 들었다. 이 방파제가 인천대 끝자락에 위치한 해상공원 마감부분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을 위한 시민아파트 건설과정에서 분양가가 과다책정된 사건도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이슈화됐다. 과다 책정된 분양가만 200억원이 넘었다. 버티던 건설사는 결국 서민들에게 이 돈을 토해내야 했다.

사후 감사에 머무르지 않고 시정을 차근차근 감시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역 케이블TV 시사프로를 맡게 된다. 의제설정부터 출연자 섭외, 사회까지 하 대표가 직접 맡았다. 물론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손을 대지 않겠다는 사전 약속이 있었기에 맡았던 프로였고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하 대표는 "지금 인천에서 시민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 대부분이 시사프로를 통해 데뷔했고 이제 이들이 인천시민운동을 이끌고 있다"며 "주 1회 프로였는데 워낙 비판적이라 담당 공무원 섭외가 제일 어려웠다. 누가 나오려 했겠는가? 원망도 많이 들었지만 성원도 많았다"고 밝혔다.

방송 시사프로 진행과 1000여편에 달하는 신문기고까지 합하면 인천지역에서 하 대표만한 '이슈 메이커'는 아직 찾기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하구라'라 부르는지 모른다.

하 대표는 "'하구라'는 그래도 양반이고 이빨, 아가리라 불린다고 하더라"라며 "방송과 신문에 이름 걸고, 그것도 무언가를 비판하려 한다면 내 스스로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밤새워 연구하고 관련 자료 찾아보고 하다 보니 나름의 논리가 생겼다. 어떤 분야를 놓고 토론해도 논리적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나를 뭐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이 하석용이가 어쩌구, 하구라가 저쩌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1000여편의 신문기고를 모아 책을 내봐라'는 제안을 받고 있는 상태다.

▲하상령과 하석용
인천지역 민족진영 인사 중에서 유일하게 1948년 남북회담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던 하상령(河相領) 선생. 올 2월 타계한 하 대표의 부친이다.

향년 100세로 생을 마감한 하상령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했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조소앙(1887~1958), 이 두 인물과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일본에서 한의학을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인천에 서점을 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김구, 조소앙 선생과 함께 하나된 조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김구가 암살당하고 조소앙이 납북되면서 이승만 정권의 정치탄압 표적이 됐다.

하 대표는 "좌·우익 간 극심한 대립이 있었지만 선친께서는 인천에서 활동하던 죽산 조봉암 선생 등과도 두루 교분이 있었다"며 "여러 선생들께서 나를 안고 조국의 미래를 말씀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하 대표는 인천의 명문 인천중·제물포고를 나왔지만 진학은 꿈을 꾸지 못했다. 정권의 감시가 계속된 터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직장을 잡을 수 없었기에 벽돌공, 솜틀공 등 막노동을 전전했고 결국 군입대를 선택했다.

연좌죄가 약화된 뒤 세무공무원을 선택했고 30대 후반이 되서야 방송통신대학교로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현재 그는 인천일보 시민편집위원회 위원장을 비롯 유네스코 인천협회, 공존사회를 모색하는 지식인연대회의 대표 등으로 여전히 활발히 활동중이다.

인천대, 청운대 강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인천바로보기 걷기운동, 인천향토사 강좌 등을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지역 현안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학창시절 3·4일 굶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만큼 가난했지만 선친께서 굴곡진 현대사 한복판에 계셨다는 것, 추구했던 길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과제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국민 개개인은 세계 최고의 역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분열된 정치상황 등으로 발전이 정체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 김칭우·사진 양진수 기자 ching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