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필 시인·수필가
며칠 전 원명 '문순득 표해시말'을 실감나게 읽었다. 고전을 만난다는 건 유익하다. 공자는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고 했고 맹자는 "책을 읽으면 옛사람과도 벗이 된다"고 했다. 또 신영복 교수는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했다.
주인공 문순득은 신안군 우이도에 살면서 홍어를 사서 나주시장에 내다 파는 홍어장수다. 그는 1801년 12월 25살 때, 흑산도 인근에서 일행 5명과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 태풍을 만났다. 10일 간 표류 끝에 도착한 곳이 류큐(현재 오키나와)였다. 이듬해 10월, 류큐에서 조공선을 타고 중국으로 가던 도중 다시 풍랑을 만나 11월에 여송국(필리핀 루손섬)에 표착하게 된다. 그는 1803년 9월, 필리핀을 출발한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하선한 뒤 중국을 거쳐 1805년 1월8일 고향 우이도에 도착한다. 3년 2개월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표해시말'은 우이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문순득의 경험담을 듣고 기록한 책이다. 다시 서미경 KBS 피디가 문헌고증과 자료검증, 현지답사를 거쳐 2010년 12월 '홍어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라는 책을 내놨다. 저자의 풍부한 감성과 해박한 지식, 유려한 글 솜씨는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며 겪은 문순득 일행의 불안과 공포, 갈증과 배고픔은 어떠했을까. 상상만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필자는 200년 전 문순득이 전하는 류큐와 여송국의 언어, 풍속 등 이야기를 한정된 지면에 충분히 옮기지 못한 점이 아쉽다. 제주도 서남쪽에 위치한 류큐는 한때 조선과 중국에 조공도 바쳤다.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온 독립국이었으나 불행히도 19세기 말엽 일본 땅이 됐다.

문순득 일행은 류큐에 머물면서 현지인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 그는 현지 말을 배우고, 생활과 풍습을 익히면서 친화력을 보였다. 류큐인들은 남녀구별 없이 한자리에서, 차 마시며 담배를 권했다. 남자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어깨에 문신을 새겼으며 바지를 따로 입지 않고 긴 저고리가 발까지 내려간 차림새에, 짚신을 신었고 일할 때 나뭇잎으로 만든 삿갓을 썼다. 집은 네모 반듯 했고 벽과 바닥을 판자로 엮었다. 고사 상에 돼지머리를 올렸다. 줄다리기 사자춤도 우리와 비슷했다. 농기구와 전통부엌은 우리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상여 나가는 모습, 매장하는 방법 등 장례문화도 낯설지 않았다. 닥나무 종이는 귀한 제품이었다. 벼는 5월에 수확하고, 고구마가 풍부하며 뱀술을 즐겼다고 한다.

다른 한편, 여송국은 어떤 관점으로 보았을까. 그들은 표류민에게 친절할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순득 일행은 도자기를 구워 서양으로 수출하는 청나라 사람들 마을에 의탁 생활했다. 그는 언어감각이 뛰어나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들과 소통하면서 노끈을 꼬아 팔기도 했고, 목공 일을 하면서 약간의 돈도 챙겼다. 여송인은 붓이 아닌 펜으로 글을 썼다. 인종이 다양하고 혼혈도 많아 보였다. 그는 또 마카오에서 90일 간 체류하면서 선박기술과 마카오시장을 꼼꼼히 눈여겨봤다. 문순득의 경험담은 정약용의 '경세유표'와 제자 이강희의 '운곡선실'에도 인용됐다. 그러나 선비의 뜻은 공염불이 됐다. 당시 조선왕조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눈감고 귀 닫고 있을 때,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 서구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해 커진 국력으로 한반도를 지배함으로써 우리민족은 치욕의 역사를 대물림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