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멀리하고 덕으로 백성 다스린 '관료 표상'
▲ 비우당 전경. 조선의 청백리 유관이 살았던 집으로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 유관 기념비.
▲ /그림=유사랑 화백
#김종순(金從舜, 1405~1483)
1463년(세조9) 봄, 세조가 경기고을을 순행하다가 경기관찰사 김종순의 여행용 짐을 확인해 보니 쌀과 콩 두어 말이 있을 뿐이었다. 임금이 곧 그를 불러 '술잔을 올리라'면서 "청렴하고 간소함이 너무 지나쳐서 관찰사가 거의 굶어 죽게 됐다"고 농을 건냈다. 그는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러 조정을 두루 섬겨서 당시 일어났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드러난 자취는 없지만, 지나친 일도 없었으며 시사(詩詞)에 능통해 명성이 높았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김행(金行, 1532~1588)
성품이 강직해 주로 외직에 머물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글씨에 능해 필법이 웅장하다는 평을 들었다. 무예와 지략에도 뛰어났다. 그가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순변사 신립이 광주에 와서 그와 하루 종일 활을 쏘았으나 당할 수 없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왕이 신립에게 수령 가운데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자 그를 천거했다. 그의 집에 불이 나자 이웃사람들이 와서 구제할 때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고, 세상을 떠나자 염(殮)할 것이 없어 손님들이 각자 옷을 벗어 염을 마쳤다. 효성을 다해 어머니를 모셨고 하찮은 물건도 사사로이 소유하지 않았다. 묘소는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산 24-10에 있다.

#박강(朴薑, ?~1460)
그는 성장하면서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와 무기제조에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이 화포를 개량할 때 군기감정에 임명돼 큰 역할을 했다.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이에 협력했으며 이후 지중추부사, 선공감 제조 등을 역임했다. 관직생활 대부분을 무반에서 보내고 이권이 걸린 관직을 수 차례 맡았지만 늘 청렴한 공직생활로 청백리에 선정됐다. 하남시 초이동에 묻혀있다.

#박처륜(朴處綸, 1445~1502)
1489년 남양부사로 일할 때 행정이 청렴 간략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묘호를 높이려하자 "전하께서 윤씨를 낳고 길러준 은혜를 생각해 장사와 제사를 후하게 치르려 하시니, 신들이 전하의 정이 그지없으신 줄은 압니다. 그러나 성종께서 이미 대신과 더불어 제사 지내는 의식을 작정하시고, 또 유교하시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다만 제사를 받으면 족하고 단연코 명호(名號)를 가지고 높이지는 못한다' 하셨으니, 그 유교(遺敎)의 엄중함이 이와 같습니다"라며 반대했다. 묘소는 부천시 오정구 작동 산 7-3에 있다.

#서견(徐甄, 생몰년 미상)
천년의 신성한 도읍이 아득히 먼데 千年神都隔渺茫(천년신도격묘망)/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많아 밝은 임금 보좌 하였네 忠良濟濟佐明王(충량제제좌명왕)/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그 공이 지금 어디 있는고 統三爲一功安在(통삼위일공안재)/전조의 왕업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却恨前朝業不長(각한전조업부장)
그가 고려를 그리워하며 남긴 시다. 이 시를 읽은 어느 대간이 그를 처벌하자고 하자 태종이 화를 내며 "고려의 신하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정이다. 우리 이씨도 어찌 능히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씨의 신하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마땅히 내버려두고 묻지 말라"고 했다. 1369년(공민왕18)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서 조선 태조 때 청백리에 선발됐다. 묘소가 의왕시 내손동 산 81에 있다.

#성영(成泳, 1547~1623)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모친 상을 당해 여막에 있다가 의병들을 모아 고장을 지켰다. 경기좌도 관찰사·경기 순찰사에 임명돼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주에 머물면서 적을 방어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에 파견돼 군량미 조달에 종사했다. 소북계(小北系) 유영경 일파에 속해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국가재정 관리에 능력을 발휘했으며, 임진왜란 후의 재정부족 타개를 위해 전화(錢貨)의 유통을 극력 주장하는 경세가의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산142-1에 묻혀있다.

#송정규(宋廷奎, 1656~1710)
그는 글씨에 뛰어나 성균관 문묘의 대성전(大成殿) 현판을 썼다. 제주목사 시절에 저술한 <해외문견록>은 17~18세기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주변부 국가들의 급변하는 상황을 해양교류사적 측면에서 저술한 책이다. 제주를 중심으로 한 표류문화를 집대성했다. 묘소는 이천시 백사면 여산 송씨(礪山宋氏) 문중 묘역에 있는데,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답게 묘비조차없이 간결하다.

#신공제(申公濟, 1469~1536)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써 가지고 와서 말했다. "이들은 공(公)의 집에서 도망친 노비인데 아무 곳에 살고 있으니 추심(推尋)하기 바란다"고 했다. 이에 그가 "나는 본래 노비가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이 물러나면서 "어리석도다, 그 관원, 이렇게 공짜로 노비를 얻기가 어찌 쉬우랴?"고 했다. 그 뒤에 또 그런 일이 있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중종반정 후 남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중종이 신공제를 특별히 창원부사로 보냈는데 덕으로 백성을 인도하니 떠났던 이들이 돌아와 생업에 종사해 관청창고가 가득 찼고, 그동안 관청 재물을 빌려가서 갚지 않은 내역을 적어놓은 장부를 태워버리니 백성들이 좋아서 춤을 췄다고 한다. 이에 관찰사가 청렴하고 근면한 수령으로 보고하니 그 해에 청백리에 선발됐다.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묻혀있다.

#유관(柳寬, 1346~1433)
그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평생토록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백하게 살았다. 집에 울타리도 없다는 말을 듣고 태종이 한밤중에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비밀로 했다. 장맛비에 지붕이 새어 방으로 빗물이 내리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장마를 견딜까"라고 농담을 한데서 비롯된 '유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그가 살았던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비우당(庇雨堂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초가집이 있다. 이곳은 그의 외손인 조선의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상속 받아 살았다.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 157번지에 묻혀있다.

/글·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기생 일타홍의 사랑에 힘입어 출세 … 청백리에 이름 올려

#심희수(沈喜壽, 1548~1622)
그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공부는 하지 않고 다 떨어진 신발에 헤어진 옷을 입고 아무 잔치나 찾아다니며 놀았다. 하루는 어느 재상이 베푼 잔치에 갔는데 그 자리에서 일타홍이라는 기생이 살며시 그를 불러내어 집 위치를 묻고는 저녁에 찾아가겠노라고 했다.
그는 신이 나서 집에 와 기다리니 정말로 그녀가 와서 그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그에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옆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제야 그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하도록 하고 조금이라도 나태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겁을 주었다. 그는 그녀가 떠날까 봐 열심히 공부했다.
이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는 다시 공부를 게을리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과거에 합격하는 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다. 결국 그는 그녀를 찾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공부에 매진해 과거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는 인사를 하러 간 어느 고관집에서 그녀를 만나서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몇 년 후 그녀는 고향 금산에 있는 부모님을 오랫동안 뵙지 못했다며 그에게 금산군수를 자원토록 해 고향에 가서 부모를 뵙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 이후 부모, 친척에게 관청에 자주 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본인도 외부와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가 <청구야담>에 전한다. 그의 묘소는 고양시 원흥동 나지막 야산 능선에 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