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는 그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 구석이 있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다. 그 나무가 그녀 집의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가장 큰 나무라 한들 내 눈에는 아직 띄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 눈에는 띄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동네 옆 산에 내 나무를 가지고 있다.' -윤후명 소설가의 <그래도 사랑이다> 중에서

최근 몇 달 간 주안동을 가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중학교 때 이사를 한 뒤로 그 동네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어떤 연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다보니 내 생활, 혹은 활동 영역이 그쪽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주안동에 살 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 뒤로는 거길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신기촌이라 불렸던 곳. 진흥요업이 있고, 공동묘지가 있던 그곳. 가끔 꿈속까지 찾아오던 그 집. 주안동 000번지. 몇 달을 벼르던 끝에 그곳에 가볼 수 있었다.

주안7동주민센터에서부터 신기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시절 5번 버스를 타러 다니던 큰 길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내가 살던 집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내 꿈에 가끔씩 나타나던 집과 비슷한 집을 발견했다. 저렇게 안방 창문과 거실 창문이 있었고, 현관문이 있었고, 마당이 있었고, 무엇보다 붉은 벽돌이 있었지. 그러다 대문 옆 기둥에 붙어 있던 번지수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번지수였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거길 떠난 지 35년만이었다. 그런데 집이 일부 리모델링됐긴 해도 내가 살던 집 모양 그대로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이 내 기억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집과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떠나고 한 번도 찾지 않았는데 너는 그대로 있었구나. 그 집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자 그 집은 세상에는 없는 소중한 가치가 돼 내게 다가왔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지라도 나만의 집을 한 채 갖게 된 것이다. 그 집에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거기 있어주어 고맙다고. 오랫동안 보지도 못하고 잊고 살았는데 나를 위해 늘 기도해주고 있었던 누군가를 만난 기분이었다. 시공간이 얽히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날이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