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 인천대 기초교육원 교수
며칠 전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 정치지도자들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고 나온 지는 이미 오래됐다. 대표적으로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렇고,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당선직후 남녀동수는 물론 장애인, 성소수자, 이슬람교도, 이주민, 난민 출신 장관 등 그야말로 다문화를 넘어 '다문화주의' 내각을 실천하면서 21세기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제시했다.

거창한 선언이나 정의 없이도 우리는 평등 사상과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우리의 헌법에도 1948년 제정당시 '법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사실상 페미니즘을 명시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선 주자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갖는 의미라면, 남녀는 물론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세계경제포럼의 성별격차 지수가 한국은 144개국 중 116위로 최하위권이다. 이를 두고 형식적 평등의 보장만으로는 과거 차별로 인해 벌어진 격차를 줄일 수 없고, 결국 적극적 시정조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유엔의 각 국가는 1979년 마련한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을 실천해왔다. 그러나 국가 간 차이는 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성차별은 여전하다. 그래서 유엔은 최근 2011년 성평등과 여성 역량 강화를 목적으로 유엔여성기구를 만들고 남성의 이해와 참여를 촉구하는 히포시(HeForShe)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럽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퇴임사 일부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평생 살아온 그조차 10년의 유엔 총장으로 있으면서 페미니스트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할 만큼, 국제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대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선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시대착오적 논쟁에 휩싸여 있다. 바로 페미니즘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있는 이상한 프레임이다.

국제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을 '계급, 인종, 종족, 능력, 성적 지향, 지리적 위치, 국적 혹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더불어,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이며,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은 캐나다 내각 구성이 보여주듯이 성별만이 아니라 계급에서부터 인종, 성적 지향까지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자는 게 21세기에 맞는 정의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폭력과 차별을 끝내기 위한 당신들의 투쟁은 모두의 투쟁입니다. 당신들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유엔과 내가 지키기로 약속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격입니다. 오늘, 저는 당신들의 편에 섭니다" 이는 2012년 유엔에서 반기문 전 총장이 한 연설의 일부다.
이처럼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에 함께 싸우겠다는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기에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이 자랑스러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전 세계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고자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시대착오적 갈등에 빠져있다. 2007년 제정 논의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제정을 미루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이 법을 찬성하면 '동성애 지지자'라고 규정되는 이상한 프레임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마련됐어야 할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황당한 프레임에 갇혀 십 수 년간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는 것이다.

성소수자는 '인정'의 문제이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이 그것을 '지지'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면 왼손잡이의 경우 과거와 달리 요즘은 비정상으로 보거나 오른손잡이가 되라고 강요받진 않는다. 때론 강요당해 오른손잡이가 되거나 양손잡이가 되더라도 왼손잡이인 게 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왼손잡이를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 거지, 이를 지지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이성애자를 지지한다고 말하지 않듯이 동성애자 역시 지지 혹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왼손잡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오른손잡이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듯이 성소수자가 이미 세상에 존재함을 인정하면 된다. 그들의 존재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법 앞에 평등한 모든 권리를 부정당하는 것을 바로잡자는 지극히 정당한 요구에 사회가 답하면 되는 것이다.

로봇과 공존하기 위한 집단지성이 절실한 4차혁명 시대에, 사람사이 차별을 금지하자는 당연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시대착오적 논쟁에서 제발 벗어나길 바란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꼭 이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