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지 않고, 기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탄핵 인용과 기각은 평범한 개인이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일이지만, 역사에서 그 교훈을 찾아볼 수는 있다.

흔히 혁명의 대명사로 여기는 프랑스 혁명이 곧바로 구체제(앙시엥레짐)를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건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비인회의를 통해 메테르니히 체제가 성립되자 혁명을 피해 망명했던 프랑스 귀족들은 승리자가 돼 돌아왔다. 혁명의 광란 속에서 왕을 단두대에 보냈던 시민과 낫을 들고 영주를 습격했던 농민들도 어느새 온순한 시민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외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권좌에 복귀한 왕과 귀족들은 예전에 누렸던 특권과 토지를 되찾으려 했다. 루이 18세는 자신이 왕위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왕과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프랑스 국기였던 삼색기 대신 부르봉 왕가의 깃발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비록 왕정이 복고(復古)됐다고 하지만, 프랑스와 시민들도 과거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겐 왕을 단두대에 보냈던 기억이 있었고, 그 후 25년 간(1789~1815) 누렸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경험이 있었다. 나폴레옹 치하와 왕정복고 시절, 외무대신으로 일했던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 1754~1838)은 이미 유럽 세계의 구체제가 모순의 한계에 다다랐고, 모든 국민들이 시민사회의 이상을 경험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자들, "(귀족들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시민들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결국, 혁명을 경험했던 민중들은 부르봉 왕가의 통치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1830년 7월 거리로 나섰다. 우리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으로 기억하는 사건, 바로 7월 혁명이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들의 종말이었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