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 고운 봄의 香氣가 어리우도다 //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 미친 봄의 봄길이 흐르도다 //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 푸른 봄의 生氣가 뛰놀아라' - 이장희 시인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
이제 곧 우수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길을 지난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고양이다. 야생 고양이들이 겨울에 많이 얼어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는 한 겨울에 고양이를 마주치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 겨울을 견딘 대견한 고양이에게 나비야, 불러보았지만 눈길 한번 주는 일 없이 제 갈 길을 가버린다. 고양이를 불렀던 내 목소리만 차가운 대기로 흩어진다. 그러다 왜 나비지? 고양이를 왜 나비라고 불렀지? 갸우뚱해진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다 재미있는 자료를 보았다. 나비는 고양이를 부르는 대표적인 이름인데, 영어로도 'Butterfly Cat(나비 고양이)'이라는 표현이 있고, 프랑스에서도 고양이를 'papillon(빠삐용)'이라고 쓰고 나비라고 번역한다는 것이다.

또한 순수한 우리 옛말에 재빠름을 묘사하는 단어인 '납다'가 있고, 이 재빠른 것들을 일컫는 말이 뒤에 명사형 어미 'ㅣ'가 붙은 '나비'였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원숭이를 '잔나비'라고 부르는 예를 들었다. 그러니까 원숭이나 고양이가 재빨라서 '나비'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영어권이나 프랑스어권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장희 시인은 1920년대에 이 시에서 봄은 고양이라는 감각적 등식을 성립시켰다. 고양이의 털과 눈과 입술, 수염에 어리는 봄빛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고양이가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고양이라면, 그 고양이에 어리는 봄빛은 어떨까.

봄으로 환기되는 생명의 약동이 좀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빨리 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나비로 불리는 고양이의 재빠름과 뭔가 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나비야"하고 봄을 불러보고 싶은 마음처럼 말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