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그리운 사람을 찾아 고향에 다녀왔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오래 전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를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길에서 명함을 주고받고, 전화번호를 물으며 우리 언제 한 번 봐야지.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서면 명함을 잃어버리고, 전화번호 저장하기를 까먹기 십상이지만, 헤어지며 친구가 남긴 한 마디가 묘하게 뒷골에 남는다. "그런데 너 참 많이 변했다." "변했다"란 말을 들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이 말 자체는 중립적이다. 변한다는 것이야 '좋게'도 '나쁘게'도 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이 들어 접하는 이 말은 씁쓸하다. 어쩌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도록 진화돼 왔을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하게 듣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기분 나쁜 것이 "너 적응 잘 하더라" 같은 말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 듣는 적응이란 말에서는 묘한 굴욕감마저 풍긴다. 온 사회가 변화와 혁신을 부르짖지만,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변화와 그 결과물인 적응은 '변절'과 동의어처럼 들리게 됐다.

한때 우리 사회를 주름잡다가 지금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엘리트들에게도 어린 시절의 친구, 동창생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한 영화평론가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성장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한국처럼 외적인 요소에 반응하고, 그에 맞춰가는 과정, '적응'이 그 자체로 '변절'과 동일시되고, 변화가 곧바로 '비극'으로 치닫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성장하지 않고, 차라리 멈춰 있는 편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체 게바라는 '먼 저편'이란 시(詩)를 썼는데, 이 시의 부제는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에게'였다. 설이 지났으니 곧 졸업 시즌이다. 자신의 꿈을 찾아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과연 그들에게 우리 사회는 긍정적인 변화와 성장을 제시하는 사회일까. 아니면 변절과 굴욕을 강요하는 사회일까.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잊지 말자. 먼 저편에서 별빛이 우리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음을.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