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신·이명준 "재물을 썩은 흙처럼 보라"
▲ /그림=유사랑 화백
▲ 이명준의 문집 '잠와유고'.
▲ 이제신 신도비.
▲ 이명준 묘소.
▲ 이제신의 인장.
이제신, 어려서부터 영특함 보여 남명 조식 "큰 인물 되리라" 기대
넷째 아들 이명준도 대이어 청렴...정약용, 목민심서에 그 일화 소개


청강 이제신과 잠와 이명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부자 청백리이다. 양평군의 전의 이씨 청강공파유적지 묘역에 잠들어 있다. 항상 자식들에게 '재물을 썩은 흙처럼 보라'고 가르친 이제신은 녹봉을 받으면 모두 가난한 친족에게 나눠 줬다고 한다. 문무를 겸비한 그는 유능한 관리였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벼슬살이가 순탄하지 못했다. 진주목사 시절에 지방 권세가들의 모함으로 병부(兵符; 병력동원을 할 수 있는 표적)를 분실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제신의 넷째 아들 이명준 또한 부친을 닮아 강직하기로 유명했는데,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일화가 등장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인물이었다.

#큰 틀을 중시한 양평의 청백리 '이제신'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은 중종에서 선조 무렵의 강직하기로 이름난 문신이자 청백리이며,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문성(文誠)이다. 그는 청강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자질구레한 것보다는 큰 틀을 중시했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불과 일곱 살의 나이로 당대에 학식과 문장으로 유명했던 성세창(成世昌) 앞에서 "새가 날아 저 푸른 하늘로 떠오르니, 푸른 하늘의 높이를 알겠고나(鳥飛靑天浮 靑天高下知)" 라는 시를 짓는 영특함이 있었다. 대학자인 남명 조식이 어린 그의 영특함을 보고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해 좌우에 차고 있던 패를 끌러줬다고 전한다.

17세 때 조욱(趙昱, 1498~1557)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스승인 조욱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일찍이 기묘사화에 연좌됐으나 화를 면한 뒤 양근(지금의 양평)에 있는 용문산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조욱은 평소 제자인 청강을 가리켜 "천리마의 뛰어남을 어찌 왕량의 채찍질을 기다려서야 알겠는가"며 칭찬하곤 했다. 25세에는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닦았으며, 29세인 1564년(명종 19) 문과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과 춘추관의 사관 및 삼조의 정랑을 거쳐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사관(史官) 시절에 숨김없이 직필하고 공평무사한 태도를 일관해 주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는 이후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장애에 직면하게 된 원인이었다.

청강은 일생 병부(兵符)와 두 번의 깊은 악연이 있었다. 당시 조정은 진주의 토착세력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선조를 비롯한 조정 관료들은 불의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청강을 이들 토호 세력을 해결할 적임자로 지목했다. 진주목사에 부임한 청강이 지역 세력가들을 족치자 궁지에 몰린 토호들은 아전과 더불어 몰래 병부를 훔쳐내어 진주목사 자리에서 면직되기를 바랬다. 이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실이 밝혀졌지만, 청강은 선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1582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중 이듬해 여진족이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됐다. 이후 경원부를 다시 회복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평소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오만하게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병부를 3일 동안 묵혀두고는 즉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죄를 씌워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청강의 재능과 전공이 큰 것을 잘 아는 선조는 형을 감면해 의주 남쪽에 있는 인산으로 귀양을 보냈지만, 48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1584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정약용이 인정한 청백리 '이명준'
자식들에게 '재물을 썩은 흙처럼 보라'고 가르친 청백리 이제신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울에서 태어나 양평에 거주한 넷째 아들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1572~1630)은 아들 중에서도 부친의 강직한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었다.

잠와는 1603년(선조 36)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가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했다. 서원현감으로 있을 때 물새들이 성안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명령을 내려 허술한 제방을 수리했는데 바로 뒤 큰 장마가 졌지만 피해가 없었고 평양서윤으로 있으면서 기와를 싸게 공급하도록 해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꿔 화재 예방에 힘썼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서제(庶弟)가 옥사에 연루돼 영덕으로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후 장령으로 임명됐는데 홀로 우뚝 서서 바른 말을 하자 조정이 이로 인해 엄숙해졌다고 한다. 영남지방에 암행어사로 가서 활동하고 있다가 이후 충청도관찰사와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갔으며 강릉대도호부사로 부임해 가난한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부담을 덜어줬다.

잠와는 인품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해 관직을 역임할 때마다 청백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허술한 집에 살면서 늘 양식 걱정을 했다. 이정암·이항복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저서로는 〈잠와유고〉 4권이 있다.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있고, 신도비는 청음(淸陰) 김상헌이 지었고 묘표음기는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었다.

다산 정약용은 청백리로 이름 높은 이명준의 일화를 〈목민심서〉에 두 번이나 소개해 수령들의 귀감이 되게 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은 인정이 많은 나라인데 인정은 곧 '뇌물'을 뜻한다고 했고, 다산 정약용은 수많은 관리를 배출한 조선에서 청백리가 드문 것은 사대부의 수치라고 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세상이 아닌, 이제신·이명준 부자와 같은 청백리의 세상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다.

/글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사진제공=양평군



이제신이 살았던 허름한 집 '귀우당' … 이명준의 유배지 오두막 '해갑와'

'귀우당'은 청강 이제신이 살았던 남산 아래 회현리에 있었던 허름한 집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해갑와'는 잠와 이명준이 유배시절에 살던 단칸 오두막의 이름이다. '귀우(歸愚)'는 어리석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고, '해갑와(蟹甲窩')는 아주 작은 '게딱지만 한 집'을 의미한다.

귀우당은 청강이 진주목사에서 물러난 뒤 살았던 곳으로 두 칸 남짓 방에 1000권에 달하는 서책만 오롯이 있던 집이었다. 귀우당은 서당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방 벽에는 수많은 서책이 둘러져 있었다. 청강은 조개나 달팽이가 들어앉을 만한 집이 있고 뱁새가 쉴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청강은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귀우당을 방문한 지인은 "집에 양식이 없는데 3품 벼슬의 봉급을 마다하고 지붕이 납작해서 일어날 때마다 이마를 찧는 집에 살면서 나 혼자 편안한다 하니 어리석은 것 아닌가"라고 조롱했다.

이에 대해 청강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안한 길임을 깨닫고 성현의 샘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 줄을 얻었네"라고 답했다. 귀우란 말은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귀우하는 것이 평안한 길 있음을 알게 되고, 성현의 샘물 길어 올릴 두레박 줄을 얻었도다.(歸愚識夷途 汲古得修玄+更)"라는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귀우는 귀거래사(歸去來辭) 하고자 하는 청강의 마음이 담긴 당호였다.

아주 작은 게딱지만 한 집이라는 뜻의 해갑와는 청백리 이명준이 살던 집의 이름으로 그 집이 너무 작아 해갑와라고 부른 것이다.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은 〈해갑와기蟹甲窩記〉라는 글에서 "온 세상의 사물은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으니 사는 사람이 만족해 하면 비록 작아도 큰 것이고 아무리 커도 사는 사람이 부족하게 생각하면 작은 것이다"고 해 게딱지만한 좁은 집에 사는 절친 잠와를 위로했다. 임숙영도 권력층의 미움을 받아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광해군 대에 왕과 권신들이 다투어 고대광실을 짓자 이들을 조롱하고 안빈낙도하는 벗과 자신을 위로한 글이라 하겠다.

/글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관련기사
[경기 청백리의 뿌리를 찾아서] 경기 청백리 이야기 ⑤-조선 최초의 청백리 천곡 안성 "죽은 뒷일은 '廉' 만을 지킬 뿐" 청렴·충의·선정·덕치 신조삼아 녹봉으로 빈민 구휼 … 절개 꿋꿋 천곡 안성(安省)은 조선시대 최초의 청백리다. 고려 우왕 6년 문과에 급제해 보문각(寶文閣) 진학사(直學士)와 상주 판관 등을 거쳐 1414년 태종 14년 강원도 도관찰사로 부임해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터전을 마련한 광주시 중대동 텃골(덕곡)마을은 광주 안씨 집안의 600년 세거지다. 광주 안씨는 안성과 함께 안팽명, 안후열, 안구, 안처선 등 5명의 청백리를 배출한 명문가문이다. 후손이 실학자 순암 안정복이다.... 뛰어난 시문·굳은 절개로 선정 베푼 '목민관' 41세 늦은 나이로 벼슬길 … 원칙·소신 갖고 '국가원로 역할'에 충실 당파 떠나 폭넓은 교유관계 … 은퇴 후 '월급 사양' 고향서 검약 생활 청백리 조경은 언관직을 수행하면서는 왕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한 강직한 정치인의 표상이었다. 당시 정국의 이슈였던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고, 윤선도의 예론을 지지했다. 84세까지 장수하면서 선조 이후 현종대까지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 국가 원로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용연서원이 있으며, 신북면 만세교리에 묻혀있다... [경기 청백리의 뿌리를 찾아서] 경기 청백리 이야기 ②-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 65년 관직 중 44년간 재상 자리 '안민철학' 바탕 대동법 등 시행 포용의 리더십으로 '국난' 극복 검소하고 소탈한 삶 '칭송 자자' '오리 정승' 이원익은 조선 중기 난세의 재상이다. 그는 '성품이 충량(忠亮)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하는 것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주목사 시절에 뽕나무 심기를 권장해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는 등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그가 도입한 대동법은 조선후기 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황희, 작은 기와집 바닥에 거적때기 깔고 … 조선 청백리의 표상 글 싣는 순서 1 청백리란 무엇인가 2 경기 청백리 3 경기 청백리 이야기 ①-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 방촌 황희는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평생을 관리로 지내며 원칙과 소신, 관용과 배려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는 탁월한 조정능력을 발휘한 '행정의 달인'이었다. 왕의 개혁과 정책이 현실에 반영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조정하고, 논쟁을 조율해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는 청빈한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로 꼽히지만,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뇌물 등에 관련한 기록 때문에 시비거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 '금' 뇌물수수 세종실록 기록 … 도덕성 시비 등 엇갈린 평가 #'황금 대사헌'이라고 부른 까닭은 그는 청백리인가, 아니면 부패한 재상일까. 그는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히지만, '대사헌 시절에 금을 받았다'고 해서 '황금 대사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같은 엇갈린 평가 때문에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세종실록에 전하는 사신 이호문(李好文)의 기록 때문이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아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했다. 또 사람을 죽이고 달아난 난신 박포의 아내를 간통했으며, …… 정권을 잡은 여러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어 의논하... 명재상 이원익, 40년 재직기간 비 새는 초가집서 생활 글 싣는 순서 1 청백리란 무엇인가 2 경기 청백리 3 경기 청백리 이야기 ①~⑨ 4 경기 청백리의 현대적 계승과 콘텐츠 활용 경기도는 청렴결백한 공직자, 청백리의 고장이다. 조선시대 청백리 200여명 중 60여명이 경기도내 곳곳에 묻혀 있거나, 경기도를 생활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방촌 황희, 오리 이원익 등은 파주, 광명에서 살았다. 여기에 안산과 파주, 남양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호 이익과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등 경기출신 실학자들은 민생을 살리는 청렴한 공직자의 자세를 강조하고, 낡고... 본인·주변까지 '청렴·청빈의 아이콘' # 이성적인 공직자 청백리 정신 파주의 율곡 이이는 에서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청렴과 근면으로 봤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는 사람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지,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청렴한 공직자와 부패한 탐관오리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에도 나온다. 사마천은 '순리열전'과 '혹리열전'에 공직자 18명이 일처리를 어떻게 했는지를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순리(循吏)가 법을 근본으로 삼아 나라를 공정하게 잘 다스리는 '좋은 관리', 즉 청백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