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
▲ 이민사 박물관.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은, 동아시아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조선에 서양 각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다. 개항으로 인해 조선의 경제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흡수됨으로써 일본 및 서구열강의 상품시장이 되면서, 소규모의 토착 수공업자들은 몰락하게 됐다.

한편 미곡의 상품화와 일본으로의 유출 등으로 인해 농민층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처럼 대다수의 민초들은 삶의 기반을 잃고 노동시장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당시 경인철도건설과 축항 등으로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던 인천은 그들에게 희망의 공간이었다.

또한 서양의 무역회사가 인천에 설립되면서 인천항에는 연신 상선들이 드나들어 부두 노동자의 수요 또한 증가하게 됐다. 이처럼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 최초의 이민선인 '갤릭'호
개항기 인천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천을 통해 다른 나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학생의 경우는 논외로 하더라도 당시 하와이나 멕시코 등으로 합법적 농업노동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의 출발지가 제물포항이었다.

1902년 12월22일 하와이로 향하는 첫 이민선 '갤릭'호가 출발한 이후, 1905년 4월까지 15회에 걸쳐 7226명이 제물포항을 통해 노동이민을 떠났다. 이들은 감당하는 어려운 노동현실 속에서도 건실한 생활태도로 점차 경제적 기반을 닦아 조국의 광복운동과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지역사회에 뿌리내렸다. 이러한 이민 1세대의 고난한 삶과 디아스포라인으로서 이후 세대의 정체성 찾기 등은 근·현대 문학의 한 테마가 됐다.


당시 이민자들은 '동서개발회사'에서 모집됐는데, 이 회사의 본점이 인천에 있었다. 이민자들의 고단한 현실을 그린 신소설로 육정수의 '송뢰금'(1908)과 이해조의 '월하가인'(1911) 등이 있다.

'개발회사라 하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빈한한 사람 생수 날 자리일세. 묵서가 지방에 진황지(陳荒地)가 썩 많은데 어찌 토옥(土沃)한지 아무 곡식이든 되로 심어 섬으로 추수하는 고로, 지금 그 나라 자본가가 제각기 거대한 금화를 들여 다투어 개척을 하는데 후히 고가(雇價)를 주고 노동자를 모집하니까 그 일에 대하여 개발회사라 하는 것을 설립하여 동양사람 중에 노동을 자원하는 자를 소개한다네.' <월하가인>
인용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많은 사람들은 개발회사의 업자들에게 속아서 멕시코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떠나기 전의 약속과 현지에서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행히 심 진사는 청나라 사람 왕대춘을 만나, 멕시코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고학을 하면서도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주미공사를 만나 공사관 서기로 있다가 공사가 퇴임할 때 함께 귀국하는 행운을 잡는다. 하지만 대다수 이민자들은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아픈 역사를 이민사박물관(월미도)에서 볼 수 있다. 인천에는 개항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