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야성 이루던 홍등가 … 전통시장 꽃피어났다
▲ 신흥시장 입구는 과거 유명한 유곽, 요즘으로 말하면 여자가 있는 술집이 즐비하던 자리다. 사진 왼쪽 오른쪽이 모두 유곽이 있었다. 왼쪽은 지금도 '실내포차'와 같은 선술집들이 늘어서 있다.
▲ 1991년 전경.
▲ 일제강점기 당시 부도유곽의 모습. 길가 양쪽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이 유곽이다.

개항기 일본 음식점들 돈 모아 '부도유곽' 형성 … 1961년 폐쇄
이후 형성된 신흥시장에 KK싸롱·신흥꽃화원 등 20년간 자리


"드르륵!"
셔터 올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꾸들꾸들 말린 생선을 채반 위에 얹는 손놀림, 가게 앞으로 옷을 진열하는 동그란 등.
하루를 여는 '신흥시장'(인천 중구 도원로 13) 상인들의 얼굴에 희망의 꽃이 환하게 피어난다.
시장 한켠, 상점이 내놓은 종이박스를 접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뭐 찾으세요?"
시장을 기웃거리는데 한 상인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걸어온다.
"전자제품 삽니다. 고장난 전자제품, 중고제품 다 삽니다."
짐칸에 중고전자제품을 잔뜩 실은 채, 천천히 지나가는 1t트럭의 스피커에서 반복적인 기계음이 흘러나온다.
신흥시장의 겨울아침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신흥시장은 1961년에 8월 24일 선화동 1-49에 개설한 시장이다. 대지 3722.3㎡ 연면적 2913㎠에 159개 점포로 시작, 신흥동 선화동 일대 주민들 이용하는 시장이었다. 이 곳은 2002년, 2009년에 이어 지금도 전통시장 현대화사업을 진행 중이다. 특히 주차장이 없어 쇼핑여건이 안 좋았으나 공영주차장을 개설하고 주차요금도 다른 시장에 비해 저렴하게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하고 있다. 신흥시장은 2000년대 초까지 문전성시를 이뤘으나 홈플러스, 이마트와 같은 대형할인점이 들어서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흥시장은 새벽 5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분주하게 고객들을 맞고 있다.

신흥시장 상가인 KK싸롱, 신흥꽃화원, 노블레스, 샤넬헤어샵, 문성세탁, 신세대패션 등은 2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오면 영업을 하고 있다. 이 가게들 맞은 편엔 신작로, 장미포차, 제일곱창, 유정포차, 쉼터에서 한잔, 주당박사 등 선술집들이 들어서 있다.

신흥시장 앞길인 이 골목엔 과거 '부도유곽'이라 불리는 고급 술집들이 불야성을 이뤘다. 개항 이후 일본 거류민들이 크게 늘면서 주변으로 '홍등가'가 형성됐다.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서 시작한 술집들이 점차 주변으로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때는 1902년이다. 일본지계 상가가 늘어나면서 신흥시장 일부인 선화동(仙花洞)은 '부도정'(敷島町)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이 곳엔 '부도루'(敷島樓)란 유곽을 중심으로 입선상반루, 환산루와 같은 요정이 들어선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웃음을 파는 여자들이 있던 술집이었다. 이 곳에서 술을 마시려면 하룻밤에 '쌀 한가마니' 값을 치러야 했다. 일본인은 물론이고 한국인도 돈만 있으면 갈 수 있었다. 개항 직후 갯벌을 매립해 만든 선화동이 신흥동과 함께 일제 강점기 전국 3대 공창(公娼)지역으로 알려진 것은 이때문이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 몰려온 사람들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관리도 있었지만 토목건축 노동자와 장사꾼들이 더 많았다. 웃음과 술을 파는 게이샤(妓生)와 몸을 파는 죠로(女郞) 등이 뒤 따라 들어온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1902년 부산 아미동(蛾眉洞)에 유곽이 생기고 사업이 잘 되면서 그해 말 인천에도 생겨난 것이 바로 부도유곽이다. 1902년 17개 일본인 요릿집 주인들은 800엔씩 공동출자를 해서 지금 신흥시장 입구에 부도루를 열었다고 전한다. 일본인 관리들은 1914년 일본식 정명을 지을 때 이 마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부도루에서 착안해 니키시마초(부도정)이라 지었던 것이다. 일본강점기 내내 인천의 명소로 소문났던 부도유곽은 문학작품의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1924년 4월 동아일보 기사에선 '지난달 부도정 유곽에 난봉꾼들이 뿌린 돈이 조선인 900여명 3000여원이고, 일본인 1000여명 1만6000원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중품미 한 말 값이 4원50전이던 시절이었다.

1946년 일본식 정명을 우리식으로 바꿀 때 부도정은 선화동으로 회복됐는데 이는 1907년 처음 지명을 정할 때 유녀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선화동 유곽은 8·15 광복 후에도 이어졌으나 1961년 군사정부 조치에 의해 폐쇄된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곳인 숭의동 '옐로하우스' 였으나 그 곳 역시 2010년 폐쇄된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양귀비꽃 같던 부도유곽은 지금 서민들이 즐겨 찾는 전통시장으로 꽃피어났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