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걸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문학산은 인천시 남구 문학동·관교동·학익동과 연수구 선학동·연수동·청학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문학산은 과거 '남산(南山)', '성산(城山)', '배꼽산' 등의 별칭이 있었는데 '남산'은 이 산이 인천부의 남쪽에 위치해 붙인 명칭이다. 그리고 '성산'은 산성이 있어서, 배꼽산은 산정에 봉수대가 있어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사람의 배꼽처럼 보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문학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원래 이름이었던 '학산'의 '학(鶴)'자와 근처 향교의 문묘(文廟)에서 '문(文)'자를 합쳐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학산이라는 명칭이 생긴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의견이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첫째, 산의 모양이 날개를 펴고 앉은 학과 같다고 해 학산이라고 불렸다는 설이다. 둘째는 조선 후기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해 건립한 서원에 숙종이 '학산서원'이라고 사액(賜額)했는데 여기에서 기인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셋째는 '주변을 빙 둘러싸다'는 의미를 가진 '두르다'의 옛말 '두루다'의 명사형인 '둠' 또는 '두룸'에서 온 것으로 보는 설이다.

이 설들 중 학산서원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것은 최근 잘못됐음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숙종이 서원에 사액하기 이전에 이미 학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한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많은데, 필자가 보기에는 세 번째 설이 유력해 보인다. 단순히 산의 형상을 따와 명명됐다는 것보다는 어원의 근거가 마련돼 있는 학설에 더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학산이라는 명칭은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산'의 사례처럼 '두루다'의 명사형인 '두룸산'으로 불리다가, 산의 이름을 한자로 바꿀 때 '두룸'을 '두루미'로 오인해 학산으로 됐을 것이라는 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의미다.

어쨌든 문학산은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현재까지 인천의 상징적인 산이며, 많은 설화를 품고 있다. 그 중 문학산의 정체성과 관련한 것으로는 비류설화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설화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류와 온조는 삼각산에 올라가 서로 살 곳을 정하기로 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으므로 문학산에 성을 쌓고 살게 됐으며, 동생인 온조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백제를 세웠다. 그런데 비류가 세운 곳은 땅이 척박하고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 적당치 않아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비류는 온조가 세운 백제에 가 보았는데 기름진 넓은 땅에 사람들이 잘 살고 나라의 기틀이 잡혀있었다. 이에 비류는 의기소침해 돌아와서 그만 죽고 말았다. 비류의 능이 문학산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하나 설만 구구할 뿐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위 설화는 비류의 미추홀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류의 건국신화는 단군이나 주몽 등 다른 건국신화에 비해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화는 일반적으로 '신이(神異)한 출생-위기(버림받음)-영웅적 면모로 인한 위기극복-건국'의 순서로 전개된다.

이에 반해 비류의 건국신화에는 '주인공의 영웅적 면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인공의 영웅적 면모는 성공한 건국일 때 빛이 나는데, 비류의 미추홀 건국은 실패한 것이기에 불완전한 형태의 신화로 전승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실패한 건국의 이유로 사람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라는 지형적 단점을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죽고 만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다른 건국신화와 차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인천지역에서는 비류와 관련된 설화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청릉마을', '능안', '능말' 등 비류의 무덤과 관련된 듯한 문학산 주변 마을의 지명을 통해 비류의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비류에 대한 인천 지역민들의 평가는 다음의 설화에서 엿볼 수 있다. 옛적 미치광이라는 양반이 배꼽산 꼭대기에 우물을 파고 성을 쌓아 도읍을 했는데, 그 자리에 안관할아버지와 안관할머니가 '안관당'을 짓고 그 신을 모셨다. 예수를 신봉하던 박호장의 아내가 아들을 시켜 안관당과 신목(느티나무)을 불태우자 즉사하는 괴변이 있은 이후 안관당 봉화지기가 머물러 살며 굿을 했다. 일제시대에 철폐되고 봉화대로 사용됐고, 현재도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제사를 지낸다.

이는 문학산에 있었던 안관당(安官堂)과 관련된 설화로, 문학산 꼭대기에 도읍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비류의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산 정상에 도읍을 한 인물, 즉 비류를 미치광이 양반이라고 할 정도로 부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비류가 도읍한 문학산과 그 자리에 지어진 안관당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성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설화에는 비록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실패한 국가였지만, 인천 지역민들에게는 한때나마 한 나라의 수도였다는 자긍심이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세 또는 외래 종교로부터 이곳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문학산은 한 나라의 도읍지였다는 인천지역민들의 자긍심이 암암리에 반영돼 있는 곳이다. 이러한 의식이 깔려 있기에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문학산이 인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산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