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이른 새벽, 헝클어진 도시를 쓸어 넘기는 대빗자루 소리를 앞으로는 박물관에서 들어야 할 것이다. 깜깜 어둠 속에 고독하게 서 있고, 때론 우직스럽게 비질하던 청소노동자의 묵묵한 풍경이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을 갖춘 청소 로봇을 통해 고비용 인력 대체 효과를 볼 것"이란 모 구청 청소담당자의 전언이 서슬처럼 TV 밖으로 흘렀다.

일찍이 소달구지나 당나귀 달구지에 나무로 엮어 얹힌 수레의 기억이 침잠해 있던 차에,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직종'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 것이어서 마음이 꿀꿀했다. 사라져가는 모든 추억들의 흉부에 인류 최고의 가치인 '아름다움'이란 훈장을 달아준다 해도 애잔한 것은, 더는 볼 수 없다는 단서가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재는 존재의 이면이라 하지 않던가. 서럽게 아름다운 뒤란에 핀 들꽃처럼 짓밟혔어도 처연한 기억으로라도 역사에 남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올 초에도 세스(Consumer Electronics Show. 생활가전전시회)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예년 같은 성황을 이뤘다고 했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생활가전 업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미래지향적 신기술과 신개념을 장착한 청사진이라는 호평 일색이었다.

스페인 지배 영향에 따라 붙인 '초원'이란 도시명이 무색할 정도로 사막에 둘러싸여 황망하기 그지없던 도시에서 가전업의 미래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과 묘하게 중첩됐다.

요즘 대세인 인공지능(AI)과 사물 인터넷(IoT)을 활용한 생활 가전제품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거리 청소용 로봇이었다. 편리함과 화려함 뒤에 숨은 노동의 부재와 땀의 상실이 불현듯 뇌수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년기에 소똥 떨어지는 모습이 불쾌했으면서도 모종의 유쾌함으로 발산했던 달구지가 삼륜 청소차로, 현대식 자동압축 청소차로 바뀌는 모습에서도 청소부의 바쁜 손놀림은 늘 존재했다.

그러나 인공지능센서에 연결된 인터넷 기능이 장착된 로봇의 등장은 사람의 손길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의 알림이었다. 이들이 인력을 대신한다면 노동의 아름다움은 퇴색된 지면에서나 찾게 되고 한혈마를 요구하던 자본주의 경쟁시스템은 더욱 치열한 승부를 치르게 되어, 더는 노동의 수고를 칭찬하는 감성구조가 필요치 않는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하이를 여행했던 적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고 싶었고, 자유공원 죤스톤 별장의 주인인 제임스 죤스톤이 일군 황푸장(黃浦江) 일대와 근대건축물을 보려 했었다.

뉴욕 맨하탄 정도는 아니어도 아시아에서 상하이 같은 규모를 가진 도시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경이적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동안 단박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건설현장이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실물경제의 주권자 책임주의를 강조한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현장이었다.

놀라운 것은 고층 빌딩을 세우는 과정에서 세우는 비계를 금속이 아닌 대나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건설노동자들의 안전한 작업을 도모하는 발판을 대나무로 엮어냈는데 철사로 얼키설키 매 놓은 것이 매우 허술하게 보였다. 게다가 상하이란 도시에 걸맞지 않게 벌 떼처럼 들러붙어 일일이 삽으로 땅을 파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모습이 생경하기까지 했었다. 포클레인과 지게차를 이용하면 훨씬 편리했었을 것이란 생각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더 많은 노동자에게 임금을'이란 구호였다. 물론 현재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공사를 치른다지만, 여전히 노동의 손길과 그 가치를 존중하는 인력창출 구조가 예와 다를 바 없다는 말에 잠시 감상에 젖어들게 했다.

요즘, 제 2의 IMF에 버금갈 정도로 얼음장 같은 경기가 지속되고 있다는 볼멘소리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구직에 애를 태우는 젊은 세대들과 실개울처럼 흐르는 돈 줄기를 쫓아가기가 너무 버거워 아이 낳는 것마저 주저된다는 신혼부부들의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메마른 샘에서 옥토가 나지 않는 것처럼 인천 전반에 걸친 불경기의 지속은 도시인구는 증대됐으되 도시정서는 황량해지고 거친 발전의 구호에 매몰돼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싸리재 완만한 고갯마루를 지나며 엉덩이 부근에 넓게 펼쳐놓은 똥받이에 둔중하게 싸놓은 소똥과 대수롭지 않게 담배 한 개비 물고, 궁둥이 아플세라 천 조각을 댄 회초리를 휘두르던 달구지 주인의 주름진 얼굴이 아련히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진공청소 로봇을 냅다 방안으로 던져 넣는 드라마 여주인공에게는 땀이 생략돼 있었다. 땀이란 무엇인가. 노동의 결정체이자 삶의 이유와 목적이 투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보증서 같은 것 아닌가. 언제일지는 모르나 허리 부러질 듯 일하고, 손가락 마디마디 갈라지는 노동의 새벽을 맞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먼 훗날에도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날이 오긴 올 것인지 조용히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