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SBS골프채널·MBC-ESPN 골프해설위원
캐디출신 골퍼로 한·일 평정, 50세 넘어서도 현역, 2013년 57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 그녀를 대표하는 짧은 수식어. 짧은 수식어 만큼이나 그녀의 생은 짧았으나 그 발자취는 한국 골프 사에 길고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2017년은 정유년으로 붉은 닭의 해다. 청간의 정은 강력한 불의 기운 즉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운을 상징하며 유는 동물로는 닭, 기운으로는 금을 상징한다. 따라서 강력한 불의 기운을 받아 도약과 용기를 가지는 그런 해가 될 것이다. 2017년도 지난해에 이어 한국 여자골프의 큰 기운이 전 세계를 더욱 휩쓸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렇게 지칠줄 모르는 한국 골프의 세계화속 그 중심에 우뚝 자리잡은 그녀의 족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큰 업적과 함께 후배 골퍼들에게 큰 귀감을 남기고 떠났다. 구옥희는 2016년 환갑을 맞았고 금년에 진갑을 맞는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오빠들과 생활한 구옥희는 1975년 고양시내 한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사실상 독학으로 골프 스윙을 배운 구옥희는 1978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제1기생으로 프로테스트를 통과했고, 1979년 쾌남오픈에서 첫 우승을 시작으로 1980년 5승, 1981년 4승을 거두며 국내 1인자로 자리를 굳혔다. 1983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의 문을 두드린 구옥희는 2005년까지 일본 무대에서 23승을 거두는 맹위를 떨쳤다. 1988년에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 대회에서 우승, 한국 선수로서는 1호 우승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서울올림픽의 열기에 묻혀 구옥희의 우승 소식에 관심을 보여준 이들은 거의 없었다.

구옥희는 2004년 한국여자골프 명예의 전당 1호로 입회했고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정규투어에 출전, 후배들과 샷 대결을 벌였다. 2011년에는 KLPGA 제11대 회장에 선출됐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구옥희는 2013년 여름 일본의 한 골프장에서 연습을 한 뒤 골프장 숙소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국내 20승 일본투어 23승. 그녀의 업적만큼 죽어서도 그녀의 전설 같은 대기록을 그리 기억해주는 이가 많지 않다. JLPGA투어에서 한국낭자들의 우승소식이 연일 들려오지만 막상 구옥희의 통산 23승 기록을 깨뜨린 선수는 없었다. 2015년까지는 전미정 22승, 안선주 20승, 이지희 19승, 이보미 13승, 신지애 11승. 작년에 시즌 2승을 추가한 전미정 선수의 통산 24승이 이뤄지던 10월23일까지 내로라하는 대 선수들의 일본 평정기록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미국서 한국여자골퍼로서 최초 우승은 박세리 선수의 우승으로 더 깊이 묻혀있다. 그녀의 나이 33세에 일군 우승인 만큼 박세리 선수의 22세 우승에 비하면 늦깎이 우승이라 하겠다.

작금의 한국 여자골프의 세계시장의 제패는 구옥희 선수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다. 고. 구옥희 전설은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이제는 평화로운 곳에서 한국 낭자들의 행보를 미소 지으며 하늘나라 페어웨이에서 뿌듯하게 내려 보고 응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리라 믿는다. 정유년, 구옥희 전설의 진갑을 맞아 그녀의 명복을 마음깊이 다시금 빌어 본다.
장자의 내편 덕충부를 인용하자면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고 산다'고 쓰여 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의 소설 '최초의 인간'에서 보듯 자신의 근원, 뿌리를 찾아 나서는 일은 어쩌면 골프를 그 자체만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의 근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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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옥희 약력
출생 1956년 8월1일
사망 2013년 7월11일
데뷔 1978년 KLPGA 입회
2004년 KLPGA명예의 전당 최초 입회
수상 2013년 체육훈장 맹호장,
마지막 우승 2005년 JLPGA투어 서클K선크스레이디스
경력 2011 4월-2012년 3월 제11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