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앞장 '노동자 신부' 40년 사제생활 마무리
▲ 호인수 신부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수난 성지 주일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 호인수 신부가 세족례 행사로 신자의 발을 닦아주고 있다. /사진제공=부개동성당
인천 지역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하는 호인수(68·사진) 베네딕토 신부가 31일 오전 10시30분 부평구 부개동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고 40년 성직생활을 마친다.

현재 부개동성당 주임신부인 호 신부는 1976년 12월7일 사제서품을 받아 천주교 인천교구 주안1동성당 보좌신부로 첫 부임 후 주임신부로서는 남동구 고잔성당에서 사목을 벌였다. 이후 부평4동, 주안5동, 백령도, 김포, 제물포, 간석2동, 덕적도 등을 거쳤다.

그가 '노동자 신부'가 된 결정적 계기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극으로 치닫던 때,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병상 신부가 인천교구 주교좌 성당인 답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 '언론자유 보장' 등을 외치다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신참 사제였던 호 신부는 선배 사제들의 명으로 김 신부의 석방을 요구하는 인천교구기도회 성명서를 작성했다.

"대학을 막 졸업해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된 저는 일반 학생들보다도 세상물정에 어두웠습니다. 가톨릭대 학생들은 100%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바깥 얘기를 들을 기회가 적었기에 정말 뭣도 모른채로 선배들이 쓰라니까 쓰게 된 것이었죠."

다음날 부평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가 중앙정보부 요원과 경찰에게 신문을 받는데, 아는 것이 없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낀 호 신부는 그때부터 사회문제들에 대해 공부를 했다.

호 신부는 김 신부가 초대위원장으로 있는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소속 신부로 활동하며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과 관련해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참여하는 등 노동자,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1983년부터는 노동자 지도신부가 돼 부평과 주안 공업단지에 위장취업한 학생운동가들을 숨겨주며 지역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호 신부는 김근태, 김문수, 이우재, 이호웅, 인재근 등 인천지역 공단에 위장취업해서 노동운동하던 학생들을 숨겨주며 가까이 지냈다.

강철이란 필명으로 대학가에 주체사상을 퍼뜨린 서울대 '강철서신' 김영환을 숨겨줬던 것도 호 신부였다.
호 신부는 "서울대에서 강철이란 이름으로 학생운동의 핵심이 됐던 김영환을 찾겠다고 중앙정보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걸 몇달을 잘 숨겨뒀는데, 어느날 갑자기 부산으로 간다고 나갔다"며 "지금 나가면 잡힌다고 말렸는데도 가야 한다며 나가더니 바로 잡혔다. 그때 걸리는 바람에 저도 고생 좀 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이어 "그런데 김영환은 MB때부턴가 반공, 반북, 친정부가 돼 극우세력에 앞장서고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선인재단 비리문제와 인천대 시립화,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계양산 개발 반대. 지역에서 따끔한 목소리가 필요한 곳엔 항상 호 신부가 있었다.

호 신부는 남성 중심의 가톨릭 문화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가톨릭에서는 미사 때 포도주와 빵을 성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리는 성찬식에서 여성에게 성체 분배를 맡기지 않고, 신자들을 대표하는 회장으로 남성만을 뽑는 등 성차별 문화가 적지 않다.

호 신부는 20년 전부터 여성에게도 성체 분배를 허용하고, 남성 회장과 여성 회장을 각각 뽑으며 가톨릭 내 성평등 문화를 조성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허례허식을 싫어해 로만칼라보다는 편한 스웨터를 즐겨 입고, 1인용 소파보다는 손님용 단체소파에 앉는 것이 편한 호인수 신부는 40년 동안의 직책을 내려놓고 은퇴하는 마음이 무겁다.

그는 "한 성당의 책임자로서 주임신부라는 직책을 어깨에 지고 있다가 그것들이 사라진다 하니 상당히 홀가분하다"면서도 "한번 사제는 영원한 사제다. 사제로서의 본분은 은퇴와 함께 끝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동안 게을렀다며, 신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40년 동안 지낸 시간을 어떻게 잘 마무리할까 고민뿐입니다. 함께 해준 신자들에게 고맙고, 그럼에도 매사에 좀 더 열정적으로 임했을 걸 하는 후회와 죄스러움, 부흥하지 못한 삶에 대해 미안함이 클 뿐입니다."

/글 황은우 기자 hew@incheonilbo.com 사진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