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 이 때쯤이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드디어 내일은 12월24일, 성탄전야(聖誕前夜). 목 빠지게 기다리던 '통금(通禁)'이 풀리는 날이었다. 일 년 만에 맞게 되는 이 금쪽같은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랑 함께 지낼 것인가. 종교를 떠나 어른이고 얘고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설렘 반 기대 반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밤 12시가 넘으면 절대로 다니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헤어져야만 한다.

국민 모두가 신데렐라처럼 신발 한 짝 흘리고 집으로 내달려야 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날인 1945년 9월9일부터 1982년 1월4일 까지 36년 4개월가량 우리 국민은 통금체제에서 살아왔다. 일 년 내내 통금이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성탄절 전야와 한해의 마지막 날(31일)에는 한시적으로 통금을 해제했다. 이런 날 집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곤 배회했다. 젊은 청춘들은 부나비처럼 화려한 불빛을 쫓아 동인천과 신포동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자정을 넘어 거리를 쏘다니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추운 날씨에 딱히 갈 곳도 없었다. 대목을 노린 다방은 2부제로 운영했다. 자정까지 한번 그리고 커피를 마시든 말든 상관없이 자정 이후에 다시 찻값을 받았다. 여관이나 여인숙은 웃돈을 주고 예약을 해야 했다. 그나마 방이 없어 아기 예수처럼 '마굿간'을 찾아 헤매야 할 판이었다. 당시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창고를 개조한 신흥동의 고고장들은 불야성을 이뤘다. 정원의 두 배 이상 입장시켜 몸을 흔들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시내 곳곳에서 '시한부 해방'에 대한 일탈이 벌어졌다. 파출소마다 폭행, 소란, 무전취식 등 경범죄자들로 꽉 찼다. 그 밤은 너무 짧았지만 이야기는 결코 짧지 않았다.

당시 정권은 그 밤에 뭘 하려고 국민의 밤을 빼앗았을까. 왜 잠들게 했을까. 지나고 보니 그들의 밤은 결코 거룩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았다. 밤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국가든 개인이든 흥망이 엇갈린다. 올해의 남은 밤을 잘 보내야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