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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 눈물겹습니다 // 머지않아 /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안도현 시인의 시 <겨울 편지>
흩날리듯 눈발이 날렸지만 아직 내 마음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메마른 날의 연속이다. 눈이 소복하게 오고,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고구마를 먹고, 식구들끼리 둘러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별로 웃기지 않은 시시껄렁한 얘기에도 까르르 웃고, 서로를 보듬고 긴긴 밤 따뜻하게 꿈 없는 잠을 자고 싶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놓고, 기업은 기업인에게 맡겨 놓고, 우리는 우리의 행복한 삶을 생각하며 살고 싶다.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겨도 믿을 수 있고, 기업은 이윤을 낳기 위해 열심히 일해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세상이 되고, 서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마음 쓰며 살고 싶다. 어쩌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기사를 검색해도 온통 협잡이 판치고, 양심은 진즉에 말아먹은 그런 얼굴, 기사 진심으로 그만보고 싶다. 양심과 상식이 살아 있는 세상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숨 쉬는 일이 버겁다. 매일매일 추리소설보다 더 스릴과 서스펜스와 뒤통수치는 반전에 놀라 경악하는 일, 이젠 그만하고 싶다. 눈이 펑펑 내려 더럽고 추악한 세상 모두 덮어버려 고요해지면 좋겠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데, 지금 이 나라의 국민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둘 이상만 모이면 불안한 정국을 얘기하느라 '우리'에 대해 얘기할 틈이 없다. 어제까지 인사를 나누던 주민이었는데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달라 반목하고, 마음은 한없이 삭막해졌다. 이렇게 만든 이에게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흰 눈을 뒤집어 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얼어 죽은 것처럼 보여도 제 속에서 울음을 삼키듯 몸을 부르르 흔드는 모습 보고 싶다. 그 매화가지 보며 가슴 시리고 싶다. 꽃을 피울 매화나무 가지를 믿고, 더디 오지만 오고야 말 사랑을 믿고 싶다. 이 겨울, 벅벅 제 가슴 긁어 상처내지 않고 서로 다독거리며, 부르르 떠는 가지에서 꽃이 피고, 고결한 향을 내뿜는 희망을 보고 싶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