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도1사'에 희생된 인천언론 … 시민들 알 권리 잃었다
▲ 1973년 7월31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서 개최된 '3사 통합대회'의 모습. 이 대회를 시작으로 대중일보의 적자인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연합신문만이 경기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이어졌다. /인천일보 DB
▲ 경기매일신문은 종간을 앞둔 1973년 8월10일 9000호를 발행한다. 사진은 당시 지면에 실린 '9천층의 바벨탑'. 조수일 전 주필이 작성한 글이다. 글 막바지에는 "우리 모두가 먼 훗날까지 찬란한 영광의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갈 것을 마음먹으며 서글픈 넋두리에 그치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인천일보 DB
대중일보는 광복직후인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창간됐다. 인천일보는 창간 71주년을 맞은 대중일보를 연속으로 보도하고 있다. 1950년 6·25로 문을 닫게된 대중일보는 이후 인천신보와 기호일보, 경인매일신문으로 제호가 바뀐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은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한다. 인천에 신문이 사라진다. 인천지역 언론인 대다수가 실직한다. 인천은 이후 1988년까지 15년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 하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언론암흑기'를 지나야 했다. 1988년 언론자유화로 인천에 언론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때 인천일보도 탄생한다.


● 유신정권과 1도1사

1도(道)1사(社). 인천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통한의 네 글자는 인천언론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한 곳에 단 하나의 신문만 허용했다. 대중일보의 맥을 잇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의 명도 이때 끊어졌다.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천은 언론암흑기를 맞이했고, 남은 신문사는 경기도에 자리 잡고 유신정권과 함께한 경기신문 뿐이었다.

유신정권은 1도1사 정책에 따라 경기도 전체에 한 곳의 신문사만 남기기로 결정한다. 당시 경기도에는 인천에 자리 잡은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 수원에 있던 연합신문 등 3곳의 언론사가 영업 중이었다. 유신정권은 '경기3사통합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1973년 7월31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서 3사 통합대회를 연다. 8월31일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는 마지막 신문을 발행하곤 폐업에 이른다. 연합신문은 경기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곤 유신정권과 함께 역사를 이어갔다.

인천언론인클럽이 발행한 인천언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통합으로 인하여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가 없는 언론 공백 시대를 맞게 된다."

통합 당시 현직에 있었던 김형희 전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은 2003년 8월 '인천언론회보'에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73년 8월31일.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발행인과 편집국장이었던 나는 그날 오후 6시 인하공사(중앙정보부 인천분실) 지하실로 연행됐다. (중략) 밤 11시30분 군화의 둔탁한 굉음이 계단 쪽에서 울려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찍어!'하며 내미는 서류를 훑어보니 '3사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와 '9월1일부터는 경기매일신문을 발행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다. 송 발행인이 거절하자 군화 한 발이 내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김 전 편집국장과 송 발행인은 결국 서류에 서명하고 만다. 오세태 전 경기일보 편집기자도 같은 지면을 통해 "사주 곽인성 사장은 비장한 모습으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다. 개인 전화까지 모두가 감시 도청당하는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통해 했다"며 "신문은 각본에 따라 만들어졌고 국민은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이 됐다. 비위 거슬린 펜은 무참히 꺾였고 야밤에 연행돼 갖은 고초와 협박을 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 거리로 나앉은 인천 언론인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폐업하면서 인천 언론인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집계된 바는 없다. 다만 당시에 일했던 언론인들을 통해 100여명 이상이 거리에 나앉았다는 증언이 이어질 뿐이다. 특히 대중일보의 맥을 이었던 언론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현직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51년부터 인천 언론사를 지켜 본 원로 언론인 김양수(83) 선생은 이렇게 전한다. "100명 넘게 실직했어요. 다른 직업을 갖는 게 쉽지 않았던 이들이 많았죠. 굶어죽거나 병을 얻은 이들도 많았고요. 인천을 떠난 사람도 다수였던 걸로 기억해요. 물론 경기신문으로 옮겨간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 말고는 다 불행하게 됐어요."

1961년부터 경기매일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경인일보(전 경기신문) 인천본사 사장과 2007년 인천신문사 사장까지 지낸 김민기(77) (재)사랑의장기기증운동 경인지역본부 이사장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인천에서 경기신문으로 옮긴 사람이 10명도 안 돼. 다들 뿔뿔이 흩어졌어. 신문사가 있어야 이직이라도 하지. 이제 다 돌아가시고 생존하신 분이 3~4명이나 될까 싶어."

/박진영·송유진 기자 erhist@incheonilbo.com



'1도1사'에서 살아남은건 수원에 본사 둔 연합신문 뿐

"1973년 통폐합 때문에 인천지역 언론인이 100여명 넘게 실직했지. 수원의 경기신문으로 이직한 건 아마 10명도 채 안됐을 거야. 그때 국회 출입기자들이 드물어서 난 옮길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말 힘들었어. 인하공사(중앙정보부 인천분실)가 신문사 사장들을 불러다가 강제하니 안들을 수가 있었겠어?"

정진철(77) 부평문화원장은 1966년 인천에 본사를 둔 경기일보 공채 1기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정권의 1도(道)1사(社) 언론 통폐합으로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들이 문을 닫을 때, 그는 경기신문으로 옮겨 1976년까지 일한다. 그는 대중일보의 맥을 끊어버린 통폐합 풍경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경기매일신문(대중일보의 후신)도 그랬지만 경기일보도 정말 당당했거든. 김응태 편집국장을 비롯해 언론계의 대부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사장부터 편집국장, 기자까지 많이 (중앙정보부 인천분실로) 불려 갔다더라고. 별수 있었겠어?"

1973년 초 인천에는 대중일보를 이은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있었다. 경기도 수원에는 연합신문이 본사를 뒀다.

유신정권이 강제한 1도1사 언론 통폐합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건 연합신문 뿐이었다. 연합신문은 경기신문으로 이름을 바꾸곤 9월1일자 창간호 독자에게 드리는 인사를 통해 "유신시대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오늘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유신과업이 최고봉에 설 것을 다짐한다"고 전한다.

/박진영·송유진 기자 erhis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