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일보 창간멤버 후손' 이훈기 OBS 방송정책TF국장 인터뷰
▲ 이훈기씨가 일제강점기 조부가 운영했던 인쇄소 선영사의 건물 뒷모습을 살피고 있다.

"인천언론사에 자리매김하도록 오피니언 리더 적극 앞장서야"
'할아버지 이종윤' 인쇄인으로 참여·'아버지 이벽' 기자 생활

광복직후인 1945년 10월7일 인천에서 대중일보가 창간됐다.

이훈기(52·OBS 국장)씨에게 올해 창간71돌을 맞은 대중일보는 남다르다. 그의 조부 이종윤(1899~1967)씨는 생전 대중일보 창간에 참여했고 부친 이벽(1926~2000)씨는 기자로 활동했다.

이씨는 "대중일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천의 자산"이라며 "인천언론사에 대중일보가 확고히 자리매김하도록 인천의 지식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적극 앞장서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종종 목소리를 높이며 '대중일보와 인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대중일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인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인물 같은데.

-대중일보는 단순한 신문이 아니다. 인천 언론의 뿌리이자 현대 인천언론의 효시다. 해방이후 관의 개입없이 자생적으로 탄생한 민간신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인쇄소를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창간 멤버였다. 나도 모르게 대중일보는 내 삶이 되어버렸다.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다.

대중일보는 어떤 신문이었다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정신을 실천한 신문이다. 기자들은 엄정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 전민족적 격동기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추호도 왜곡치 않는 불편부당을 강조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중일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

-조부는 일제강점기 인천에서 인쇄소인 선영사(鮮英舍)를 운영했다. 대중일보가 창간될 때 인쇄인으로 참여했다. 인쇄소에서 번 돈으로 대중일보 운영자금의 일부를 보탰다는 말을 들었다. 부친은 1947년 22세의 나이로 대중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조부와 부친의 대중일보 이후 활동은.

-조부는 대중일보가 인천신보로 다시 태어나자 부사장겸 편집인, 이후 경기매일신문에서도 부사장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부친은 인천신보 취재부장, 동양통신 인천특파원, 경기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73년 언론의 강제통폐합으로 부친은 강제로 언론계를 떠나셨다.

부친에 대한 기억은.

-부친은 엄격하고 말이 거의 없으셨다. 부친이 근무했던 경기일보 편집국이 신포동 사거리에 있었다. 어렸을 때 종종 놀러갔다. 어른이 되고 보니 조부와 부친의 꼿꼿한 피가 내게도 흐르는 것같다. 조부는 이승만 정권에 항거했고 부친은 유신정권에 저항했다.

이씨는 인터뷰 중 인천 내리교회 밑에 있는 선영사 건물을 직접 보자고 했다. 그의 조부가 일제강점기때 운영하던 인쇄소 선영사의 원형은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은 노래방과 식당이 들어서 있다.

선영사 건물을 보니 어떤가.

-건물 뒷부분 등 벽돌 원형이 그대로여서 감회가 새롭다. 조부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1927년부터 인쇄소 선영사를 운영했다. 활판인쇄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의 IT처럼 최첨단 산업이었다. 서울에서도 거의 없는 인쇄술이었다고 한다. 모친께서는 선영사에서 대중일보를 찍었다고 말씀하신다.

인천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도 할말이 많던데.

-인천의 지도층 인사라는 분들의 상당수가 인천정체성을 논하고 인천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뿐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대중일보는 인천은 물론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는 신문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념사업회 건립 등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는 대중일보기념사업회 발족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했다. 언론상 제정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스마트폰에는 대중일보 지면을 비롯해 조부와 부친 사진, 당시 언론사 건물과 편집국 장면 등 사진 수백장이 저장되어 있다.

[이훈기씨 집안은] 3대가 언론인… 500년 넘게 인천에 산 토박이

▲ 이훈기씨의 부친 이벽씨의 기자 시절. 3대 언론인 집안이다.

이훈기씨는 500년넘게 인천에 산 토박이 집안 출신이다. 이씨는 고성 이씨로 조상인 이칙(李則·1438~1496)이 1400년대 후반 조선 성종으로부터 화수동 일대 땅을 하사받아 인천에 정착했다고 했다. 이칙은 조선 세조때 대사헌과 대사성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 관찰사로 나가려 할 때 유생 200여명이 중앙에 머물러 있기를 주청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이 고성 이씨였다. 이칙의 무덤도 파헤쳐질 위험에 놓였으나 그를 존경했던 군사들이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서구 검단에 이칙을 비롯해 조부 이종윤, 부친 이벽 등 이훈기씨의 조상묘가 자리잡고 있다.

이씨는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화수동과 인현동에 살았다고 했다. 인현동에 살 때 조부께서 인쇄소 선영사를 운영한 것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노모를 모시고 학익동에 살고 있다.

조부인 이종윤은 박문초등학교 2회 졸업생으로 장면 전총리와 60년 지기였다. 장총리 권유로 일본에 유학하고 오사카대판매일신문사에서 4년간 신문 실무를 익힌다. 귀국후 선영사를 차린다. 장면총리로부터 공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부친 이벽은 '반골'이었다. 인천 대기업 동일방직 비리사건을 보도한 후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이씨는 1991년부터 언론인 생활을 하고 있다. 3대가 언론사 경력을 합치면 조부 20년, 부친 26년, 본인 26년으로 72년에 이른다.


/이두 기자 two2two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