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강제언론통폐합 될 때까지 많은 언론인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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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일보는 1945년 창간돼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으로 1973년까지 역사를 이어간다. 28년 역사는 인천언론인의 맹활약으로 장식돼 있다.

비리 보도와 함께 사표를 던진 이벽, 6·25 전쟁에서 전황을 보도했던 종군기자이자 문인이었던 조수일, 1도1사 통폐합 15년의 아픔을 딛고 언론인으로 복귀했던 오종원 등 수 많은 언론인이 인천의 현대사를 함께 했다.

언론인 이벽은 1945년 10월 대중일보 창간과 함께 기자로 출발했던 인물이다. 인천신보 초기 인천의 대기업인 동일방직이 세무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포착한다. 그는 기사를 작성해 이를 보도했다.

하지만 동일방직으로부터 후원을 받던 인천신보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자 송수안 사장은 다음날 이에 반대되는 기사를 보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자신의 특종과 반대되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본 그는 분개했다. 그 자리에서 동일방직에 치명적인 비리기사를 작성한 뒤, 사표를 던지고 만다.

이후 동양통신, 경기일보를 거쳐 편집국장을 지낸다. 통폐합 이후에는 인천천주교사를 집필했다고 한다.

조수일은 1950년 인천신보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 담았다. 그는 지역 신문 가운데 유일하게 6·25 전쟁을 보도한 종군기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에서 언론인으로 살아가며 편집국장까지 오른다. 그 역시 언론계를 떠나게 된 계기는 통폐합이었다.

오종원 선생은 1950년대 초반부터 편집기자로 시작해 경기매일신문 시절 편집부국장에 올랐다.

편집 실무와 안살림을 철저하게 관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통폐합 이후 인천상공회의소 조사홍보부장을 맡았다.

언론자유화와 함께 지역 언론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1988년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편집국장으로 복귀해 지역 언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김상봉 선생은 1951년 인천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성했다. 동양통신사, 인천공보를 거쳐 주간인천과 인천신문에서도 근무했다. 주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한 시사해설이 주특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0년에는 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직에 올랐다가, 통폐합 이후 향토사학자로 활동 한다. 1994년에는 인천일보 객원논설위원에 위촉됐다. 인천 정치의 거목 김은하 국회의원의 동생이다.


/박진영·송유진 기자 erhist@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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