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향토지 만들자" 실업가·문인 중심 뜻 모아
신포동 사옥 마련…창간 당시 '지역성' 확고히 명시
우리말 캠페인·친일파 청산 등 앞선 시대정신 담겨

광복직후 창간된 대중일보는 인천에서, 인천사람들이 만든 인천지역 신문이다. 인천 신포동에 사옥을 마련했고 인천지역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창간한 '인천의 대표언론'이다. 인천 사람들이 국문을 기반으로 작성한 첫 신문이기도 했다.

창간사에서 "인천의 성장이 곧 국가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히며 '인천을 기반'으로 한다는 지역성을 확고히 명시하고 있다. 우리말 사용 캠페인, 친일세력 청산, 여성기자 모집 등의 기사에서 시대를 앞서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 앞선 시대정신을 전달했다

대중일보는 어떤 신문보다 진취적이고 선진적인 정신을 담았다. 일제강점기 인천에 있던 신문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그해 대중일보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민족의 기쁨과 함께 분출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일보의 역사적인 창간호 톱기사도 그동안 민족을 억눌렀던 일제를 겨누고 있었다. 제목은 '일본인 재산에 동결령'. 미군정이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고 매매·취득에 관한 권리행사를 일절 금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발행했던 기존의 언론과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광복 직후 친일파 척결도 민족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대중일보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친일파를 척결해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인천지부장을 맡고 있던 이성민을 인터뷰한 기사와 인천지역 친일의 거두 김태훈 검거 기사를 게재했고, 민족의 배반자를 처단하자는 논조를 꾸준히 유지했다. '해방운동 36년사',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에 대한 '3열사 추념기' 기획기사도 눈에 띈다. 매년 3·1절 기념식에 전 사원이 단체로 참가하고, 다음날 신문을 휴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천하는 지성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주의도 지향하고 있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드문 시대에 '여기자 1명 모집'이라는 사고를 싣거나, '우리 여성도 완전 해방하라' 등의 기사에서 대중일보의 여성평등 정신이 드러난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였던 1945년 말에 작성된 내용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었던 셈이다.

인천 최초의 국문판 신문이었던 대중일보는 '말살하자 왜말, 바로잡자 우리말' 캠페인 기사를 통해 우리말 쓰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제목을 포함한 모든 지면을 한글로 제작한 사례도 있다.

대중일보의 지면은 종합일간지 성격에 맞게 다양하게 꾸려졌다. 1945년 10월11일자부터 소설 '삼불당'을 연재했고, 고정 가십기사 코너 '터진개(신포시장의 옛 이름)'를 마련해 독자의 관심을 모았다.

지면은 크게 1면에 국내 정치·외신, 2면에 인천 소식을 전하는 형태로 꾸려진다. 광복 후 국내 정치가 주된 기사로 다뤄졌지만, 인천을 중심으로 교육정책이나 문화·체육 등 각종 협회 소식, 사건·사고도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지역의 첫 파업소식을 전하거나 시 재정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행정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 인천 사람 기대 컸다

▲ 1950년 한국 마라톤 선수가 미국 보스톤대회 석권을 알리는 대중일보 호외. /인천일보 DB

당시 인천 사람들이 대중일보에 거는 기대는 창간 축사와 축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천 의학박사 1호인 신태범 박사는 창간호 다음 신문에 '향토 인천의 낭보'라는 축사를 보내 "대중일보 제일보를 보며 민족 해방에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며 "신문의 존재이유는 정확하게 신속한 보도와 공정한 여론 반영이다. 불편부당한 시각으로 시민의 동향을 통찰해 공정한 여론을 수립할 지성과 열정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1930~1940년대 대표 시인 임화의 축시 '자유언론의 사용'은 "인천항이 해외와 교섭하는 문호가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귀 신문이 해야 할 정치적 문화적 역할은 중대하다"며 "모든 것을 비판하고 근로 대중의 행복 증진에 기여하는 것만이 언론의 자유가 진가를 발휘하는 방도"라고 적고 있다. 언론에 바라는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대중일보의 비상

1947년 대중일보는 서울지사를 세워 서울까지 취재 영역을 넓힌다. 인천~서울 마라톤대회, 남녀궁술대회, 야구대회 등의 시민들이 필요하고 즐길만한 각종 행사도 열었다.

1949년 광복절에는 4면 특집을 발행하며 지역 대표언론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간다. 1950년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한국인이 1~3위를 휩쓸자 호외를 발행하기도 한다.

대중일보는 1950년 6·25전까지 꾸준히 발행되다가 9월 인천과 서울이 수복되자 인천신보로 다시 태어난다.


/박진영·송유진 기자 erhist@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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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일보 창간 71주년 특별기획] 대중일보는 인천의 신문이었다 오늘은 인천언론사에 뜻깊은 날이다. 광복직후인 1945년 오늘 인천에서 대중일보(大衆日報)가 창간됐다. 1면은 국내외 소식, 2면은 인천 소식으로 채워졌다. 화장품, 목재, 영화, 음식점 광고도 실렸다. 인천 신포동에 사무실이 있었던 대중일보는 오로지 인천인들의 노력과 자본으로 만들어졌으며 인천의 소식을 전했다. 대중일보는 1950년 6·25전까지 발행됐다. 대중일보의 불편부당, 공정한 비판 정신을 지향하는 인천일보는 대중일보 창간의 의미와 대중일보의 맥을 잇는 인천신문들, 독재정권에 짓밟혔던 지역 언론, 인천 언론이 나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