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국공원·만국공원으로 불렸던 인천 자유공원의 옛 사진. 1919년 4월2일 이곳에선 한성정부 수립을 알리는 13도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사진제공=인천시

독립운동사 거목 70주기 … 업적 걸맞은 사회적 평가 이뤄져야

1946년 9월9일 독립운동가 만오 홍진(1877~1946) 선생이 눈을 감았다. 오늘로 꼭 70주기를 맞는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만오의 묘역은 1994년 10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전까진 인천 문학산 기슭에 묻혀 있었다. 풍산 홍씨 가문의 선산이 있던 자리다.

만오는 독립운동사의 거목이다.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을 지냈다. 특히 대한민국 의회정치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시정부의 의회 기능을 했던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책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2006)에 "홍진은 가장 오랜 기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의회정치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임시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도 홍진의 큰 공헌"이라고 썼다.

만오는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고국 땅을 밟았다. 그해 12월19일 덕수궁에서 열린 임시정부 개선 환영회에선 "눈바람 찬 저녁에 망명의 길을 걷던 우리들을 이처럼 성대하게 맞아주심에 부끄러움과 황송함을 금할 수 없다"는 소감을 남겼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중국 상하이로 떠난 지 27년 만이었다.

3·1운동의 열기가 전국으로 번지던 1919년 3월17일. 법조인으로 활동하던 만오는 종교계 인사 이규갑 등과 서울 광화문 옆 검사 한성오의 집에 모였다. 이날 회합에선 '한성정부' 조직안이 논의됐다. 이들은 인천 만국공원, 지금의 자유공원에 각 지역 대표들을 소집하기로 했다.

보름여 만인 4월2일 만국공원에선 13도대표자대회가 열렸다. 한성정부 수립을 공포하는 자리였다.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홍진이 대회 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관교동에 가문의 선영이 있었던 데다 외국의 조계들이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성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태가 됐다. 상하이 임시정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 정부가 공포되면서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자유공원은 임시정부가 출발한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역사는 기록으로만 남았다. 지금 자유공원에선 한성정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70년 전 세워졌던 만오의 묘비는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만오도, 13도대표자대회도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다.

풍산 홍씨 대종회 부회장인 홍건석(72)씨는 "문중 차원에선 국립묘지 참배와 연구 모임 등을 하고 있으나 홍진 선생의 업적에 걸맞은 사회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며 "젊은 시절 홍진 선생을 보좌하고, 관련 자료를 정리해온 그의 손자 홍석주씨도 미국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고 말했다.

▲1919년 13도대표자 모여 '한성정부 수립' 공포

▲ 8일 찾은 인천 자유공원의 모습. 만오 홍진과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진 13도대표자대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1919년 4월2일 '한성정부'의 13도대표자대회가 열렸던 인천 자유공원은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1888년 조성된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자유공원은 1883년 개항으로 설정된 각국 조계지에 위치했다. 조계지는 지금의 중구 항동, 송학동, 북성동 등지를 포함하는 46만2000㎡에 이르는 면적이었다. 자유공원은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휴식 공간이었던 것이다.

자유공원은 독립운동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3·1운동이 계속되던 1919년 3월9일 오후 기독교 신자와 학생 약 300여명은 바로 이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강제 해산당했다.

만세운동은 시내 전역으로 번졌다. 당시 인천은 일본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국내로 전달된 통로이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도 그만큼 삼엄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위해 지역·종교 대표자 20여명이 자유공원에 비밀리에 모였다. 엄지손가락에는 흰 종이나 헝겊을 둘러 서로를 알아봤다. 정부를 수립하려고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최초의 회합이었다.

양윤모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수립운동에서 13도대표자대회가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 바로 인천 만국공원의 역사적 위치"라고 했다. 

▲만오와 백범, 임시정부 마지막까지 지켜... 내김구, 홍진 장의위원장 맡아

▲ 만오 홍진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6년 9월13일 만오 홍진은 숨을 거둔 채로 인천에 돌아온다. 1919년 13도대표자대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를 내린 곳이자 선산이 있던 인천에서 장례식이 열리면서다. 당시 장의위원장은 백범 김구였다.

만오와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다. 1926년 12월 만오에 이어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 자리를 이어받은 이가 백범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백범일지'에도 몇 차례 언급된다. 1940년 5월 만오가 활동했던 한국독립당과 백범의 한국국민당 등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면서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은 김구, 집행위원은 홍진 … 등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만오와 백범은 임시정부를 마지막까지 지킨 인물이었다. 만오는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 의회인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좌우익 세력이 통일 의회를 꾸렸던 때였다.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임시정부 환국 절차가 늦어지면서 해방 3개월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5년 11월23일 상해를 떠난 제1진 비행기에는 백범이, 일주일여가 지나 12월1일 출발한 제2진 비행기에는 만오가 타고 있었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